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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물론의 윤리 : 비인간과 인간이 함께 만드는 세계' - 김지혜 박사 특강
  • 2022-06-30
  • 2016
2022년부터 지구와사람은 각 소속 학회가 추천하는 외부 전문가를 초청하여 이야기를 듣고 시민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연속기획 '열린세미나'를 개최한다. 지난 5월 12일 바이오크라시 연구회의 추천으로 김지혜 박사(이하 '발제자')를 모시고 〈신유물론의 윤리: 비인간과 인간이 만드는 세계〉라는 제목으로 첫 걸음을 옮겼다.



발제자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신유물론의 관점을 통해 지구, 인간, 자연과 같은 광범위한 존재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는 것이 강연의 취지임을 밝혔다.

발제자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기존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며 논의를 시작했다. 환경생태학의 기본 전제로서 실재론적 접근에 따르면 사회와 생태는 변증법적으로 상호 변화한다고 본다. 정치생태학의 기본 전제로서 사회구성주의적 접근에 따르면 공간의 변형은 인간적인 것, 즉 사회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본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기존 모델은 총체로서의 자연과 총체로서의 사회가 있음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공통된다. 총체 관계들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이론적 관심이 놓인 것이다. 

이런 관점을 새롭게 보는 것이 과학기술학의 관점이며, 그 중요한 두 흐름이 행위자-연결망 이론(ANT; Actor-Network Theory)과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의 흐름이다. ANT는 인간과 비인간의 공조 하에 사실이 생산된다는 문제의식에 서 있다. 사회는 인간들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자연 역시 비인간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 즉 인간-비인간 집합체라고 본다.
이로서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관심은 자연과 인간 그 자체가 아닌, 하나하나의 행위자-연결망에 대한 것이 되었다. ANT는 일반이론보다는 복수의 자연, 복수의 사회를 논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ANT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특정 행위자에 대한 자의적 결합이 문제된다. 가령 라투르(Latour, B.)가 총과 사람의 결합을 통해 사태를 설명할 때, 바람의 방향 같은 것이 배제된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것을 전부 고려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특정한 세계를 체화한 관찰자가 행위자-연결망에 개입하고 있음을 ANT는 놓친 것이다. 우리의 위치에 따라 지식의 형태가 바뀐다는 상황적 지식(Situated Knowledges) 개념을 통해 이를 극복한 것이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이다.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에 따르면 자연과 인간은 쌍으로 존재하며, 관찰자의 위치에 따라 자연과 문화는 가변적인 것이 된다. 이때, 차이가 있음은 타자가 존재함을 뜻하므로, 자아와 타자라는 두 항의 구성과 해체를 이야기를 하게 된다. 바로 이것이 신유물론으로 가기 위한 장이다.



그렇다면 신유물론 윤리란 무엇일까? 발제자는 이 역시도 발제자 자신의 '특정한 위치'에서 말하는 점이라고 밝힌다. 우선 발제자는 신유물론은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의 한계를 뛰어넘으며, 물질과 의식의 분리를 경게하며 이 세계의 문제에 접근하려 한다고 정리한다. 신유물론을 이해하기 위해 중요한 개념으로서 카렌 바라드(Karen Barad)의 얽힘(Enganglement) 개념과 해러웨이의 공동-생산(Sympoiesis) 개념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각각 '세계와 존재의 관계'와 '타자와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의 문제와 관련된다.

첫째로 얽힘에 관해 보자면, 얽힘 개념은 주체-객체 이분법이나 독립적 주체들 간의 상호작용을 가정하는 근대적 세계관에 대한 도전과 관련된다. 카렌 바라드는 물리철학자이자 페미니스트 과학기술학자로서 양자역학의 해석을 다룬 책 〈Meeting the Universe Halfway〉에서 얽힘의 문제를 다룬다. 바라드는 이를 한편으로 양자역학의 이중 슬릿 실험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 비국소성을 통해 설명한다.

양자역학의 이중 슬릿 실험에서, 우리가 관찰하려는 자연적 존재는 물질세계의 배치의 결과로 성질이 결정된다. 다시말해 실험장치와 같은 비인간의 배치를 통해 대상의 성질이 결정되는 것인데, 이로써 물질의 배치가 곧 기호로서의 역할을 하므로 '물질기호성' 또는 물질-담론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바로 그 자연의 부분으로서 관찰자가 되어 세계 속에서만 세계를 관찰하는 것이다. 즉, 바라드에 따를 때 관찰은 세계에서 독립된 주체의 상호작용이 아닌 세계의 부분이자 관찰 주체인 관찰자의 내적-작용(intra-action)이다.

세계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상호 영향을 미치지 않는 국소적(nonlocality)인 것이 아니다. 양자역학에서는 하나의 상태가 결정되면 다른 하나의 상태는 동시에 결정된다는 것이 실험적으로도 증명된다. 이 점에서 우리는 정보를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동시에 변하며 세계가 관여해서 우리의 상태를 결정한다고 보아야 한다. 결국 물질성과 담론성, 인식론과 존재론, 유기체와 비유기체, 인간과 비인간, 사실과 가치, 자연과 문화, 주체와 객체라는 두 항의 분리는 내재적인 것이 아니라 물질-담론적으로 얽혀 현상될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세계가 결정하는 것이며, 세계는 비국소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식과 존재는 얽혀있는 것이고, 바라드의 존재론은 존재-인식론으로 이야기할 수밖에 없고, 이항의 분리가 내재적 분리가 아닌 물질-담론적으로 얽혀 현상되는 것일 뿐이다. 그 현상은 세계가 결정하는 것이고 세계는 비국소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타자와 함께 살아가고 세계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를 위해 두번째 중요 개념으로서 공동-생산을 이해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지속적으로 생산하는 조직을 자기생산체계라 하고 이는 자기폐쇄성을 갖는다는 점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때 '자기'란 무엇인지 문제된다. 바라드에게서 자기는 세계와 결합되면서 불안정한 지위에 놓인다. 세계 속에서 자기가 생성되고 자기 없이는 세계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는 타자를 필요로 한다.

해러웨이(Haraway, D.)는 자기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생산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공동-생산(Sympoiesis) 개념을 이야기한다. 각 개체에게는 내적 자율성을 갖지만 이는 타자를 인식, 감내하며 타자와 함께 변형되므로 이는 공동-생산이다. 복수의 주체들은 서로의 모티브가 되면서 세계가 변형된다. 이것은 함께 세계를 짓는(world + ing) 과정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실천의 영역으로서 세계짓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세계짓기에서 모두가 어떤 특정한 지점에서 세계의 참여자로서 개입한다는 점에서 더이상 주체-객체와 같은 이항이 불가능하게 된다. 세계를 다르게 만들어간다는 것은 세계 밖에서 세계를 부수는 외파의 과정이 아니며, 그 안에서 내파하는 것이다.
 
핵심은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 있다. 신유물론은 복수의 자연을 긍정하면서, 결정되어 있지 않은 세계의 실험을 강조한다. 신유물론은 책임에 대한 다른 이해도 제시한다. '책임'은 주체만 갖고 있지 않고, 타자를 보며 우리의 윤리를 규정한다는 점에서 응답 능력(respons + ability)을 키우는 것이 윤리적 과제라는 것이다. 세계 안에서 세계를 바꾸어 나가는 것이 신유물론의 과제이며, 여기에서 개별주의(individualism)에 대한 큰 비판을 내재하고 있다. 우리는 독립적 관찰자로 보이지만 우리는 독립적이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또한 무조건적 생명예찬에 대해서도 경계한다. 생명 역시 비인간과 인간이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며, 어떤 생명으로 살 것인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물(인간을 포함한 존재)들과 그때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더 천착한다.

우리가 선(line)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선을 만들고 있다면, 우리는 어떤 선을 누구의 선과 어떻게 엮을 것인가? 우리는 어떤 자연을 문화화할 것이며, 어떤 문화를 자연화할 것인가? 신유물론은 이러한 문제에 봉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