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 스페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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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유재스페셜] '토마스 베리와 회칙 <찬미받으소서>' - 데니스 오하라 교수 초청강연 (6월 3일)
  • 2019-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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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3일, 데니스 오하라(Dennis OHara) 캐나다 토론토대학교 윤리신학 교수를 초청해 세 번째 유재스페셜 강연을 개최했다. 이날 강연은 경희대 미래문명원과 한국토마스베리가 함께 공동주최로 나서 더욱 의미 있는 행사였다. 
데니스 오하라 교수는 지구와사람의 철학적 토대를 제공한 생태사상가 토마스 베리의 제자 중 하나다. 철학박사이자 자연요법 의사이기도 하며, 2002년부터 캐나다 여러 대학에서 그리스도교 윤리와 생태신학 및 윤리, 환경과 건강 등에 대해 강의해온 토마스 베리 전문가다. 현재 토론토대학교 윤리신학 교수를 맡고 있으며 2013년 방한해 토마스 베리의 생태사상에 관련한 다양한 강연을 펼친 바 있다.
이날 강연에서는 토마스 베리의 사상이 2015년 5월 24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발표한 〈찬미받으소서〉 회칙 작성에 어떠한 기초를 제공하였는지, 그리고 어떤 내용이 앞으로 더 보완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며 앞으로 생태적 문화로의 급진적 변혁을 위해 우리가 어떠한 기조를 가지고 삶을 이어나가야 하는지 힌트를 얻을 수 있는 좋은 계기였다. 


강연 영상 및 녹취록






사회: 최선호 (변호사)
통역: 이정규 (노원우주학교 관장)


사회: 오늘 이 집 어떠세요? 아마 오늘 처음 오신 분도 계시고 몇 번 오신 분도 계실 텐데, 이 집 입구에 현판이 있어요. 그 현판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인데, ‘남길 유留’에 ‘집 재齋’죠. 근데 유재는 추사 김정희의 제자인 남병길의 호입니다. ‘남김을 주는 집’이라는 의미인데 추사가 제자에게 유재라는 호를 지어주면서 그 뜻을 시로 쓴 게 있어 읽어드리겠습니다.

다 쓰지 않은 기교를 남겨서 조물주에게 돌려주고
다 쓰지 않은 녹을 남겨서 나라에 남겨주고
다 쓰지 않은 재물을 남겨서 백성에게 돌려주고
다 쓰지 않은 복을 남겨서 자손에게 돌려주라

조그만 한옥이지만 이 집은 그런 뜻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도시에 찌든 공간에 있다가 여기에 오면 마음이 편안해지곤 합니다. 이곳이 야생의 공간이라면 야생의 시간 또한 흐르고 있고, 바쁘게 돌아가는 바깥의 시간과 다르게 이 안에 모인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를 지향하며 순환하는 다른 시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곳에서 오늘은 토론토 대학교 세인트 마이클 대학 신학부에서 생태신학과 윤리를 가르치고 계신 데니스 패트릭 오하라 박사를 모시고 ‘토마스 베리와 회칙 〈찬미받으소서〉’라는 주제로 말씀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오하라 박사님은 처음에 자연요법과 대체의학을 공부하셨습니다. 그래서 동양의 ‘기氣’에 대한 이해를 충분히 하신 이후에 신학 공부를 하셨습니다. 현재는 캐나다, 미국, 유럽 등지에서 강의를 많이 하시는데, 한국엔 두 번째 오셨습니다. 그럼 선생님의 말씀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데니스 오하라: 소개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강의해 본 곳 중에서 가장 우아한 장소인 것 같습니다. 오늘 저녁에 이 자리에 있게 된 게 아주 큰 즐거움인데요, 여기 오기 전에 저도 ‘지구와사람’이 뭐하는 곳인지 찾아봤습니다. 정말 엄청나게 뛰어난 일들을 하고 계시는 걸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오늘 저녁에는 교황님의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가 나오기 전에 토마스 베리 신부님의 작업이 어떻게 회칙의 토대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토마스 베리 신부님이 어떤 분이신지부터 알려드리고 〈찬미받으소서〉 회칙에 대해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토마스 베리 신부님이 작업하셨던 아주 많은 주제들 중에서 〈찬미받으소서〉 회칙 안에 반영된 것들이 있습니다. 그 모든 주제를 살펴보지는 못하겠지만, 중요한 몇 가지들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토마스 베리 신부님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태어나셔서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예수 고난회 사제셨고요, 문명사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으셨습니다. 세계 종교를 공부하셨는데, 그 공부를 하실 때 다양한 종교가 기원한 나라를 직접 방문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리 신부님이 가시는 걸 보고 사람들은 거기서 선교활동을 해서 그 공동체 사람들을 카톨릭으로 개종시키시겠구나 라고 생각했었는데, 신부님의 생각은 조금 다르셨습니다. 그 나라들에 가시면 경전이 쓰여진 언어를 먼저 공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종교를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 이해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 종교에 담겨 있는 지혜를 존중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 종교들에 담겨 있는 지혜가 토마스 베리 신부님의 연구 작업 곳곳에서 발견됩니다. 이게 제2차 바티칸 공회 이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토마스 베리 신부님은 카톨릭이 다른 종교들을 존중할 수 있을 때 더 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이미 하고 계셨던 겁니다. 작은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토마스 베리 신부님이 대학에서 세계 종교에 대해서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거기 계신 분들이 너무 급진적이라고 생각을 하셨던 거예요. 그래서 대학교에서 가르치기에는 너무 위험하니까 수련과정에 있는 수사님들이 토마스 베리 신부님과 같이 공부를 하신 겁니다. 그러다가 제 스승님이 토마스 베리 신부님을 만나게 되신 겁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우주 이야기』와 우주론(cosmology)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창발하는 우주론과 우주사학, 종교론을 통합하는 공부를 하게 됐습니다. 그 분은 인간이 지구를 파괴하는 방식으로 살고 있다는 걸 잘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지구를 파괴하고 있는 이유가 인간이 스스로를 다른 것들과 분리된 존재이자 보다 우월한 존재라 여기고 있는 까닭이라고 이해하셨습니다. 동시에 우리가 피조물의 신성함에 대한 감각도 잃어버렸다고 하셨습니다. 토마스 베리 신부님의 작업 자체가 이런 결핍과 결함들을 극복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잠시 〈찬미받으소서〉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회칙은 정말 많은 사람들이 기다렸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교황 직에 오르자마자 생태 재앙에 대해 다루는 회칙을 쓰실 거라는 힌트를 주셨었어요. 그래서 이 회칙에 대한 관심이 정말 높았는데, 신학계뿐만 아니라 과학, 정치 경제 등 사회 정의를 이야기하시는 많은 분들도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 회칙이 나오기도 전에 제가 회칙에 어떤 내용이 들어갈 것인지에 관한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많이 받았습니다. 마치 제가 어떤 내용이 들어갈 건지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기라고 한 것처럼 말이죠. 회칙이 나오기 전에 미리 제가 그 카피를 볼 수 있었는데, 바티칸에서 이 회칙이 나오고 나면 제가 그것을 설명하는 걸 티브이나 라디오, 신문에서 이야기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제게 미리 보내줬습니다. 실제로 회칙이 나왔을 때 많은 방송 활동을 했었습니다. 
제가 늘 저희 학생들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과제를 전날 밤까지 미뤄두지 말라고요. 그런 말을 하던 제가 발표되기 하루 전까지 읽지 않고 내버려뒀었습니다. (웃음) 그래서 막상 읽으려고 보니 184쪽이나 되더라고요. 그런데 읽어 보니 회칙이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마치 좋은 친구가 조언을 해주듯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광범위한 독자들에게 상당히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시고 회칙에 어떤 내용들이 있는지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염두에 두실 것은 우리가 피조물의 신성한 감각을 잃어버렸다는 것과 우리가 자연의 일부이지 자연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세주이자 창조주이시라는 사실에서 시작해 보겠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그리스도가 구세주이시라는 건 당연한 이야기였습니다만, 그리스도가 창조주이시라는 건 아니었습니다. 창조는 삼위일체에서 첫 번째 인격께서 하신 일이었죠. 그런데 토마스 베리 신부님은 그리스도 안에 창조적 차원이 있다는 것, ‘우주적 그리스도의 차원’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그러면서 요한복음의 도입부를 인용하시죠. 그리스도께서는 시간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계셨었고 그분을 통해 모든 것이 생겨났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었고, 우리 안에 거하게 되셨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말씀’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의 로고스(logos)를 번역한 것입니다. 로고스란 그리스 철학에서 질서 내지는 명료함을 뜻합니다. 피조물 안에는 어떤 명료한 질서가 포함돼 있다는 것이죠. 새는 절벽에서 날아갈 수 있지만, 우리 같은 경우는 절벽에서 걸어내려 와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죠. 요한복음 도입부에 이런 창조세계, 피조물의 질서를 가져오시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성서에 보면 “한 처음에~” 라고 시작하는 또다른 책이 있습니다. 바로 「창세기」입니다. 「창세기」의 처음에는 “혼돈이 있었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이 창조물 위를 감돌았고, 곧 질서가 등장합니다. 밤과 낮이 생겨나고, 육지와 바다가 생겨납니다. 요한복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창조의 질서를 가져오는 전통적인 지혜를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바오로 성인이 골로새 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야기도 있는데요, 그리스도가 이걸 창조하신 것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그것들을 유지시키시며 만물 안에 질서와 명료함이라는 것을 가져 오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토마스 베리 신부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걸 처음 들었을 때 정말 신났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138억 년 우주이야기를 들을 때 아주 처음부터 거기에 신성한 차원이 있다는 걸 이해하게 된 것이었으니까요. 창조하시던 첫 순간뿐만 아니라 진화가 계속되는 그 모든 순간들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탱하시고 양육하시는 그런 성스러운 시간이었던 거죠.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생각해 볼 때, 33년 정도 살아 계셨던 역사적 인물로서 뿐만 아니라 수십억 년 동안 내내 우리와 함께 진화의 일부로 계셨던 ‘우주적 그리스도’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같은 주제를 〈찬미받으소서〉에서 표현하고 계십니다. 골로새 인들에게 보낸 편지라든지, 요한복음의 머리글도 〈찬미받으소서〉에서 인용하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신비는 세상의 한 처음부터, 특히 강생 때부터 그 자율성을 손상 받지 않으면서 자연 전체의 실재 안에서 숨겨진 방식으로 활동한다.” 

교황님께서 지적하신 중요한 부분은 ‘숨겨진 방식으로 활동하시지만 자율성을 손상하지 않는 방식’이라는 거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양육하고 지탱시켜 주시지만, 뭔가를 결정해서 통제하지 않는 방식으로 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우주적 그리스도학’이라고나 할까요, 이런 건 샤르댕 신부님한테서 전해 온 것이고, 토마스 베리 신부님께서 받아들이셨는데, 이것을 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토마스 베리 신부님께서는 ‘계시(revelation)’를 나타내는 두 권의 책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한 권은 당연히 성서이고요, 또 하나는 ‘창조된 세계 그 자체’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 두 권의 책을 주셨다면, 우리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그 책 중의 한 권을 거부하고 심지어는 훼손하기까지 하겠습니까. 그리스도교 전통에는 이런 이야기를 한 지도자들이 많이 계십니다. 
제가 수업을 하다 보면, 이 창조된 세계 자체가 계시를 드러내는 책이라는 것에 저항하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 이야기를 하는 엄청난 문헌을 쏟아 부어 그 저항을 무너뜨립니다. 그렇지만 오늘 저녁에는 한 가지만 사용하겠습니다.(웃음)
제가 제일 좋아하는 문구이기도 한데, 아우구스티노 성인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을 급진적이라고 생각하진 않지 않습니까? 하지만 성인께서는 자연을 ‘계시의 책’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책’으로서 우리에게 말을 한다,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자연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죠. 바오로 성인께서 로마인들에게 쓴 편지에서도 보면, 자연을 통해서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편지에 나오는 내용 자체가 그리스도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느냐,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경험하지 않았으니까 천국에 못 가는 것 아니냐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지 못했는데, 그걸 그 사람들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라는 질문이었죠. 그랬을 때 바오로 성인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도 하느님이 창조한 세계는 우리와 함께 있었고, 그 질서에 따라서 우리의 삶의 질서를 꾸려가게 되어 있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찬미받으소서〉에서도 ‘무언의 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토마스 베리 신부님도 비슷한 맥락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을 인용하십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께서는 ‘왜 그렇게 나무의 종류가 많으냐?’ 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창조를 왜 하셨을까, 라는 반문으로 답을 시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 사랑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는데,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자신을 나누고 싶어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선하심이라는 것은 무한하고 균일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한 가지 표현 방식으로 나타낼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자체가 또다른 하느님이 될 테니까요. 그래서 하느님의 선하심이라는 것은 다양한 방식으로 발현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창조된 세계의 한 부분을 바라볼 때, 그 안에서 제가 하느님의 선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전체를 바라볼 때는 하느님의 선하심이 어떤 것인지 더 크게 일별할 수 있습니다. 창조된 세계의 피조물 각자가 하느님의 신성함으로 드러내주고 있는 것이죠. 그렇기에 우리가 한 종種이 멸종되게 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어떤 한 일면을 영원히 침묵시키는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이기에 이런 걸 하고 있는 걸까요? 엄청난 오만인 것이죠. 교황님께서도 이런 표현을 하고 계십니다. 아퀴나스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인용하십니다. 프란치스코 성인께서는 하느님의 선하심을 모든 창조 세계에서 찾았습니다. 하느님이 하신 모든 일을 통해서 하느님의 지혜가 우리에게 알려졌다고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서 이 모든 피조물들을 ‘계시의 책’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두 권의 ‘계시의 책’을 공부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다음 주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창조세계와 분리되지 않은 인간’이라는 주제입니다. 먼저 ‘우주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138억년에 걸친 이야기이기 때문에 디테일은 조금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여러분께 140억 년 우주 진화사에 관한 책을 한 권 써보라고 숙제를 낸다고 했을 때, 페이지 당 100만 년의 내용을 쓰시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각 권에는 500페이지가 있다고 한다면, 총 28권이 필요하게 되겠죠. 전체 28권 중에서 지구가 등장하는 건 19권에 와서입니다. 그리고 가장 원시적인 생명체가 등장하게 되는 건 21권이고요, 진짜 원시적인, 가장 최초의 인류는 28권 - 마지막 권이죠 - 그 책의 398쪽에 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 문명이라고 하는 건 28권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두 단어에 해당됩니다. 사실, 두 단어라고 하는 것도 많이 봐주는 겁니다. (웃음) 어쩌면 한 단어 정도가 가장 정확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인간)는 우리가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 책 전체가 전부 우리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이 28권 중에 27권에는 인간은 아예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 자체는 너무나도 훌륭하지요. 그리고 그 앞선 책에 정말 멋진 캐릭터들이 많이 나와서 그 다음 캐릭터가 등장하는 데 훌륭한 역할들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한번 생각을 해보죠. 여기 28권의 책이 있는데, 지구가 생성되기 시작하는 건 19권에서부터입니다. 21권에 가면 최초의 생명체 플랑크톤이 산소를 생성하기 시작합니다. 그렇다면 20권에서 인간이 등장할 수 있을까요? 아직 산소가 없으니 불가능하겠죠? 인간이 등장하려면 적당한 지구적 환경과 조건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그럼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다른 생명체들도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파충류에 집중해보겠습니다. 파충류가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건 약 3억 년 전입니다. 파충류가 등장하기 전에 곤충이 있었고, 식물이 있었습니다. 곤충과 식물이 먼저 등장해서 파충류가 등장할 수 있는 지구적 환경을 만들어 놓을 수 있었던 것이죠. 다르게 얘기하면, 파충류는 곤충과 식물의 도움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파충류는 조류나 포유류는 딱히 신경 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존재 자체가 그것들에게 달려 있는 게 아니거든요. 어떤 면에서는 조류나 포유류가 등장하지 않는 게 자기들에게 유리할 수도 있죠. 왜냐하면 자기들을 잡아먹으니까요. 제가 무슨 얘기하려는지 아시겠죠?
인간은 가장 나중에 등장한 생명체 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 이전에 탄생했던 모든 존재들의 도움이 있어야만 우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그래서 인간이 모든 존재들과 분리되어서 우리가 최고야, 챔피언이야, 라고 말할 수 있기는커녕 다른 종에 비해 인간이 가장 취약한 존재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다른 종들을 멸종시키고 있는 이런 상황 자체가 상당히 병리적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토마스 베리 신부님은 창조 세계 안에서 다른 생명체들과 우리가 아주 깊은 연결감을 같이 발견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의 공동체의 일부라는 것,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재발견해야한다고도 말씀하시고요. 우리가 미래를 가지고 싶다면 지구 공동체의 모든 존재들에게도 미래가 있어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계시죠. 우리가 다른 존재들과 분리되어있지 않았다고요. 우리가 통합적인 생태계의 일부라는 얘기입니다. 모든 것들은 상호 연결되어 있고, 상호의존적인 것입니다. 우리 몸 자체가 이런 관계를 바로 드러내 줍니다. 우리의 몸은 다른 피조물들에게서 오는 산소와 영양분이 있어야지만 살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제가 잭 포거스라는 분의 목소리를 소개하고 싶은데요, 제가 살고 있는 지역의 원주민 어른이십니다. 북미 원주민들은 자신을 다른 피조물들과 분리되어 있다고 결코 보지 않습니다. 이 분들은 “내가 손을 하나 잃어도 살 수 있고 발을 하나 잃어도 살 수 있고 눈을 하나 잃어도 살 수 있지만, 내가 공기를 잃어버리면 죽을 것이고 내가 물을 잃어버리는 죽을 것이고 내가 태양을 잃어버리면 죽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내 진짜 몸은 무엇이냐? 이게 바로 교황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같습니다. “우리의 몸이 다른 피조물들과 아주 직접적인, 긴밀한 관계를 맺게 해준다.”라는 것이죠. 이게 바로 제가 회칙 전체에서 가장 좋아하는 인용문입니다.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전문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한 하느님 아버지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이 서로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있어 함께 보편가정, 즉 숭고한 공동체를 이루어 거룩하고 사랑이 넘치며 겸손한 존중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확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육신을 통하여 우리를 둘러싼 세상과 긴밀하게 결합시켜 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토양의 사막화를 마치 우리 몸이 병든 것처럼 느끼고 동식물의 멸종을 우리의 몸이 떨어져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럽게 느낍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멸종을 우리 몸이 떨어져나가는 것처럼 느끼지 않는다면 우린 정말 깨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가족 중 누군가를 잃었을 때 눈물을 흘린다면, 어떤 종이 멸종되었을 때에도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지구 공동체의 한 가족을 잃어버리는 것이니까요. 
토마스 베리 신부님께서는 나아가서 자연계의 모든 것이 주체라고, 단순한 객체가 아니라고 일깨워주십니다. 『우주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생명체들이 다른 종이 등장할 수 있는 조건들을 계속 만들어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본다면 각기 존재들이 ‘우주 이야기’라는 드라마에서 어떤 소품이 아니라 정말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주체가 되는 것이죠. 모든 주체들이 서로를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생태대(Ecozoic era)라는 시대로 움직여가기 위해서는 우주가 ‘객체들의 집합이 아닌 주체들의 친교’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교황님께서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계신데, ‘모든 인간이 주체’라는 말로 시작하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 - 가난한 사람들, 변방에 있는 사람들, 여성들, 이주자들 -을 주체가 아닌 대상, 객체로 다룰 때가 있죠. 그리고 교황님은 나아가서 피조물들도 대상이 아닌 주체라고 말씀하시며 모든 것들이 내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모든 창조물들엔 내재된 가치가 있다는 뜻이죠. 이들이 가치가 있는 건 우리에게 어떤 쓸모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이 만드신 종 자체만으로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피조물들의 궁극적인 목적이 우리 인간이 아니라고도 말씀하시고, “모든 피조물들이 하느님을 향해 가는 공통의 종착점을 지향하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라고도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우리 앞에 있는 난관이 얼마나 큰지, 그 규모가 얼마나 거대한지를 잘 이해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고도 이야기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이 다른 모든 존재들과 분리되어 있고, 피조물의 신성함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이런 병리적인 사고 때문에 경제 사회 정치가 지구를 망가뜨리는 시스템들을 만들어 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존재에 대한 이해, 우리 정체성에 대한 이해를 재창조해야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구에 다시 매혹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통합된 지구의 한 부분임을 인식해야 하는 거죠. 이 지점이 현재 특히 중요합니다. ‘우주 이야기’ 중 ‘지구 이야기’ 부분을 보면, 다섯 번의 대멸종기가 있었습니다. 대멸종이라는 것은 당시에 존재하던 생명체의 50% 이상이 사라질 때를 말합니다. 어떤 한 종의 일부가 죽고 나머지는 살아남는 것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종 전체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대멸종이 지구 역사상 다섯 번 있었다는 것이죠. 이런 일이 일어났던 이유는 소행성이 충돌한다거나 화산활동이 너무 활발해서 기후 변화가 급격하게 일어난다거나 하는 것들 때문이었습니다. 그 다섯 번의 대멸종 중에서도 가장 심각했던 것은 2억 5천 만 년 전에 있었던, 바다의 육지의 생명체 95% 이상이 사라졌던 페름기(Permian period) 말의 멸종입니다. 그리고 6천 5백 만 년 전에 있었던 대멸종으로 공룡이 사라졌습니다. 여기서 제가 강조하는 것은 인류계가 아니라 인류세(Anthropocene)입니다. 우리는 지금 대멸종의 한가운데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자면, 지금 대멸종이 오고 있다가 아니라 이미 우리가 지금 대멸종의 한가운데 있다, 라는 점입니다. 대멸종은 이미 시작이 됐는데, 관건은 이 멸종이 50%에서 끝날 것이냐 75%에서 끝날 것이냐 95%에서 끝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생태 재앙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에 시간이 걸리면 걸릴수록 그 퍼센티지는 더 커질 것입니다. 북미에서는 지금 산불이 더 자주, 대규모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홍수도 마찬가지입니다. 토네이도와 허리케인도 그렇고, 농업작물도 잘 자라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서 비로소 사람들이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구나, 라는 걸 인식해 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대멸종의 영향들을 최소화할 수 있는 결정들은 여전히 내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교황님께서 지적하고 계신 부분입니다. 지금은 뭔가 피상적인 변화로는 충분하지 않다, 모든 것을 아주 깊은 수준에서 바꿔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주 다른 종류의 경제가 필요하고 다른 종류의 정치구조와 사회구조가 필요하며 지구에서 도망을 가는 게 아니라 지구를 포함하는 영성을 개발해야 한다고도 말씀하십니다. 토마스 베리 신부님과 교황님 두 분 다 우리가 ‘창조 이야기’ 안에 깊숙이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창조 이야기’는 하느님에 대해서, 그리고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것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창조 이야기’를 ‘신성한 이야기’로 받아들여야 되고, 상호의존적으로 통합된 이야기 속에서 우리 자신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라야만 우리가 서로를 강화시킬 뿐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들도 강화시키는 그런 미래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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