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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留齋)는 지구와사람의 회원공간으로, 유재 특강은 지구와사람이 기획하는 비정기 특별강연입니다. 해외에서 오시는 손님들과 특별한 방문인사를 초대하는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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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유재스페셜] '<버닝> 세계의 그 모호함에 대하여' - 이창동 감독 초청강연 (6월 11일)
  • 2019-06-26
  • 1413

지난 6월 11일, 이창동 영화감독을 초청해 네 번째 유재스페셜 강연을 개최했다. 경희대 미래문명원과 함께한 이 강연에서는 2018년 칸 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연맹상을 수상한 작품 〈버닝〉을 토대로 그의 작품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소설가로 먼저 등단한 후 영화감독이 된 이창동 감독의 작품은 무엇보다 문학에 기반을 두고 있기에 인간 본성의 이야기와 물음을 영화에 문학적으로 녹여내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전 문화부장관을 역임하기도 한 그가 내놓은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 〈시〉, 〈버닝〉 이렇게 총 여섯 작품은 국내외에서 늘 주목받고 인정받았다. 그중 〈오아시스〉는 베니스 영화제에서 FIPRESCI상과 특별감독상을 〈시〉는 칸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날 강연에서는 독립적인 삶을 살고 있는 세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버닝〉에서 은유와 상징을 통해 드러난 오늘날 세계의 모호함과 경계 없음을 살펴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알 수 없는 세상과 혼돈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더불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헛간을 태우다〉를 이야기의 토대로 한 만큼 이를 둘러싼 해석과 영화의 재해석 이야기를 함께 들을 수 있던 흥미진진한 자리였다. 


강연 녹취록


사회: 강정 시인


사회: 오늘 유재에 이창동 감독님을 모시고 “‘버닝’ - 세계의 그 모호함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얘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감독님에 대해선 익히 잘 아실 테지만, 간단하게 소개 좀 드리겠습니다. 1983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전리」라는 작품으로 소설가로 등단하셔서 소설가로 활동하시다가 그 십 여 년 후에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라는 영화의 조연출을 하시면서 영화계로 - 궁극적으론 비슷한 영역이긴 하지만 - ‘이직’을 하셨습니다. 1997년도에 ‘초록물고기’라는 영화로 입봉하셨고, 그 이후에 ‘박하사탕’ ‘오아시스’ ‘밀양’ ‘시’ 등을 연출하시고 작년에 ‘버닝’이란 영화를 발표하셨습니다. 
해외에서도 인정을 많이 받으셨는데, 상을 너무 많이 받으셔서 제가 일일이 소개하긴 힘들 것 같네요. 작년의 ‘버닝’ 같은 경우는 대종상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셨습니다. 그리고 2010년에 ‘시’라는 작품으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셨는데, 두 번 다 시상식엔 참석 안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구와사람 강금실 대표님과는 2003년 노무현 정부 1기 내각 입각 동기이십니다. 그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을 역임하셨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정부에서 전 세계 정치 경제 문화 통틀어서 국제적으로 공헌한 사람에게 수여하는 레종 도뇌르 훈장을 2006년도에 수여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에선 다섯 명 정도가 그 훈장을 받은 걸로 알고 있는데, 지휘자 정명훈, 임권택 감독 그리고 나머지는 경제계 인사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창동 감독님을 문학계 선배로 20여 년 전에 멀리서 처음 뵌 적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애송이 시인이었습니다. 오늘 영화 얘기, 특히 ‘버닝’에 관한 얘기는 아마 감독님께서 하시게 될 것 같은데, 제가 개인적으로 이창동 감독님의 소설을 중학생 때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운명에 관하여」라는 작품인데, 단편인지 중편인지 잘 기억이 안 납니다. 그 당시 그 작품이 티브이 단막극으로 각색돼서 방영이 됐었어요. 소설을 먼저 읽었었는지 드라마를 먼저 봤었는지 헷갈리는데, 중학생 남자애가 재미있어 할 만한 내용은 아니었습니다만, 어떤 소시민이 삶에 부대끼고 인간사 자체가 깊숙한 고통의 뿌리에서 출발한다, 는 내용을 굉장히 밀도 높은 문장으로 쓰셔서 마음을 옭아맸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밀도가 굉장히 강렬해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는데, 감독님의 영화를 봐도 여전히 그런 느낌이 듭니다. 아무튼 감독님의 영화를 보면 늘 마음이 힘들어 지곤 하는데, 감독님 영화를 누군가와 같이 보고나면 늘 싸우게 되더라고요. (웃음) 그만큼 해석이 분분할 수 있다, 사람 내면의 어떤 부분을 강하게 건드린다고 얘기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누구나 자기 맥락 안에서 섬세하게 감춰진 어떤 것들을 들춰내는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감독님의 말씀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창동: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분위기가 오붓하고 좋네요. 이런 공간에서 얘기하는 게 처음이라 기분이 색다른 것 같습니다. 저는 제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게 굉장히 싫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한데, 홍보를 해야 하니까 관객과의 대화도 하고 영화제 같은 데 가서 여러 얘기들을 해야 하는 상황들이 있습니다. 그건 일종의 의무감으로 하게 되는데, 영화 흥행도 다 끝난 상황에서 (웃음) 이렇게 오붓한 자리에서 여러분께 제 영화 이야기를 한다는 게 민망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 동안 관객과의 대화에서는 홍보용 이야기를 했었다면, 오늘은 좀 솔직하고 내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용기를 내서 나왔습니다. 
여기 제목이 ‘버닝 - 세계의 그 모호함에 대하여’라고 되어 있는데, 강 변호사께서 제안을 했을 때, 영화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하면서 제목을 무엇으로 할 거냐고 물어보기에 그 자리에서 대충 얘기한 겁니다.(웃음) 그래서 크게 준비한 건 아닙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닝’이라는 영화는 우리가 사는 오늘날의 세계의 모호함에 대한 영화이기도 한 바, 딱히 영화 이야기에만 머무르기 보다는 영화를 통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 그리고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삶, 또는 영화를 포함한 여러 예술의 역할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를 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어느 정도 운을 떼고 나면, 같이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사회자가 제 영화를 소개하는데, 옆에서 듣기에도 영화 참 재미없고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웃음)  ‘버닝’이란 영화는 특히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제가 지금껏 영화를 만들면서 항상 영화가 힘들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대체로 힘든 가운데에도 뭔가 긍정적인 것을 받아들이고, 마음으로나 정서적으로나 공감해 주는 걸 느낄 수 있었는데, ‘버닝’의 경우 제가 예상하기도 했지만, 특히 국내에서 어렵다는 얘길 많이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해외의 경우는 대개 영화제나 소위 ‘아트하우스’ 같은 데서 만나는 관객들이니까 일반 관객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겁니다. 한국에서 ‘버닝’은 여태 제가 만들었던 영화들 보다 훨씬 덜 우호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느꼈습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던 바였지만요. 
그럼에도 이 영화를 어떻게 만들게 되었는지부터 말씀 드리면서 이 영화에 관련된 얘기를 하겠습니다. 처음 계기는 일본 NHK 방송국에서 저한테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단편 소설 하나를 선택해서 영화로 연출해주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었어요. 그 제안을 처음 받았을 때 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많이 읽어본 적이 없고, 심리적인 거리감이랄까요, 여하간 제가 작가로 있는 동안에 경험한 것들과 맞물려 있는 게 있어서 그렇게 편한 작가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기는 좀 힘들 것 같다고 얘기했더니, 그렇다면 연출 말고 제작을 해줄 수 있겠냐고 물었습니다. 제 생각엔 NHK의 그 프로젝트가 대놓고 얘기하긴 좀 그렇습니다만, 약간 노벨상 프로모션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NHK에서 제안한 사람이 저뿐 아니라, 대만 감독, 일본 감독, 중국 감독 등 동아시아의 4대 감독 한 사람씩에게 각각 다른 단편소설 하나 선택해서 영화를 만들도록 제안하는 큰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래서 어찌됐든 제작을 의뢰하기에 젊은 감독에게 기회를 줄 수 있겠다 싶어서 제작은 해 보겠다 하면서 젊은 감독, 특히 잠재력이 있는 독립 영화감독에게 같이 해보자며 진행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일본 쪽에서 진행이 느렸습니다. NHK가 워낙 거대 방송국인데다가 관료적인 요소가 강해서 진행이 잘 안 되었던 거죠. 그렇게 한참 기다리다가 감독은 자기 스케줄 때문에 그만두었고, 또 다른 젊은 감독을 구했는데 또 같은 문제가 생겨서 지지부진하던 차에 같이 몇 년 동안 일하던 작가가 「헛간을 태우다」라고 한국말로 번역된 단편소설 - 영어로는 ‘Barn burning’ - 을 제가 연출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읽어 봤는데, 처음엔 잘 이해가 안 가는 면(왜 이걸 나더러 하라고 하지?)이 있었지만, 결국 해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그 단편소설을 읽어 보신 분이 계실지 모르겠는데, 그 소설은 굉장히 짧고 단순한 이야기입니다. 원래 무라카미 씨의 단편소설들은 한국 단편소설에 비해서도 짧습니다. 주인공이 30대 작가로 나옵니다. 아마도 작가 본인인 것 같은, 본인은 겪은 이야기인 척 하는 소설입니다. 화자가 평소 알고 지내는 20대 초반에 모델 일을 하는 어떤 여자가 나옵니다. 이 여자가 아프리카 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는데 작가에게 마중을 좀 나와 달라고 해서 공항에 나갔더니, 아프리카에서 만난 일본 남자를 데리고 나타납니다. 여자가 그 남자를 소개시켜 주고 나중에 그 남자가 도쿄에 있는 자기 집에 찾아 와서 - 마침 화자의 아내는 집을 비운 상태입니다. -  집 뒷마당에서 대마초를 피우게 됩니다. 여자는 취해서 자고요. 그 남자는 20대 중반으로 작가보다 더 젊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남자가 화자에게 자기에겐 헛간을 태우는 취미가 있다, 두 달에 한번 정도 헛간을 태운다, 는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작가가 그러면 경찰에 안 잡혀가느냐고 물으니 남자가 ‘버려진 헛간을 태운 거니까 경찰도 아무 관심 없고, 나는 그저 쓸모없는 헛간을 태울 뿐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그날도 그 동네에 헛간을 태우러 왔다고 말합니다. 하나 좋은 걸 봐뒀다고요. 그러자 작가가 그 이야기에 꽂혀서 매일 아침 조깅을 하면서 주변에 있는 헛간이 탔나 안 탔나 돌아보는데, 끝내 불탄 헛간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보면 조금 밑도 끝도 없는 얘기죠.(웃음) 그리고 끝까지 그 결말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여자는 없어졌고요. 여자가 없어진 것과 헛간을 태웠냐 안 태웠냐의 인과관계도 명확하게 되어있지 않습니다, 소설에서는. 그 소설을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 보면서 이 이야기를 뭔가 영화적으로 확장시켜서 뭔가 의미 있는 이야기로 만들어 볼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어서 영화를 하게 된 것이죠.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원작으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저한테 꽤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보통 영화는 원작이 있을 수도 있고, 그 원작이 어느 나라의 어떤 원작이든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밀양’이라는 영화도 이청준 선생의 「벌레이야기」라는 단편소설이 원작이었고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은 저만의 각별한 의미가 있었던 건데, 그런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해드리는 것이 오늘날의 이 모호한 세계를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1980년대, 그러니까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소설가로 데뷔했었는데, 제 또래의 작가들을 당시에 ‘80년대 작가’라고 불렀습니다. 한국은 묘하게도 작가들이 10년 단위로 나뉘는 세대적인 차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50년대 작가로는 손창섭, 장용학 등이 계신데 이분들은 6·25라는 전쟁이 작가적 바탕이 되었고, 60년대 작가들 - 김승옥, 이청준 등 - 은 4·19의 경험이 작가로서의 바탕이 됩니다. 그리고 70년대 작가 - 황석영, 김원일 등 - 들은 70년대의 산업화가 작가적 바탕이 됐죠. 저 같은 작가들의 경우는 80년대 초에 있었던 광주항쟁에 대한 죄의식을 문학적 바탕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저 자신도 80년 5월 17일 계엄령이 떨어졌을 때 대학교 4학년이었는데, 마침 학교에 갔더니 해병대가 교문을 막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같은 날 광주에는 특전사가 갔었는데 그 직후에 시민들을 상대로 피의 학살이 일어났었습니다. 그 사실을 저는 나중에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제가 알게 된 광주에서의 비극이 겉으로 이야기 할 수 없고, 그런 일이 일어났었던 같은 시각에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다는 죄의식과 무력감, 자괴감 들이 있었습니다. 80년대 작가들의 작품들은 대부분 그런 죄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현실의 모순에 대해서 뭔가 문학적으로 발언을 해야만 하는데, 전두환 정권이 강력하게 억압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현실을 비판하고 현실에서 전망을 찾는 문학을 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현실에 대한 고민을 하고 내 글이 현실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야만 한다, 라는 도덕적 책무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정작 제대로 쓰지는 못하는 그런 공통점이 있었던 거죠. 
그러다가 80년대 말에 이른바 제도적 민주주의, 형식적 민주주의 이루어지고 나서 90년대에 들어서면서 갑자기 분위기가 바뀌게 됩니다. 문단에서도 바뀌고, 문단 바깥에서도 바뀌게 된 거죠. 더 이상 현실을 이야기하고,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철 지난 문학처럼 여겨지게 됩니다. 뭔가 새롭고, 뭔가 감각적인 새로운 상상력을 추구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거죠. 다른 작가들도 어느 정도는 그랬었겠지만, 저는 그런 분위기에 대해서 마음의 우울이랄까요, 그런 기분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제도적인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 동안 같이 고민해 왔던 사회적 모순 같은 문제들은 전혀 해결되지 않았는데, 마치 문학과 예술이 그 모든 문제들에서 해방된 것처럼 뭔가 새로운 걸 추구하고, 현실을 이야기하는 게 덜 세련되어 보이고 촌스러워 보이는 듯한 분위기로 급격히 변해버린 것이었죠. 어쩌면 80년대 작가들이 80년대 동안 내내 작품 활동하면서 현실에 대해 너무 많은 고민을 했기 때문에 그런 후유증이 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저는 어쨌든 문학이 힘을 잃어버렸다고 할까요, 마음의 동력이 떨어져버렸다고 할까요, 아무튼 그런 사실들이 제가 문학을 하다가 영화판으로 오게 된 한 계기가 되었던 겁니다. 
사실, 어딜 가도 ‘왜 소설 쓰다가 영화를 하게 되었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에는 너무 얘기가 길고, 외국사람에겐 해봐야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도 못하고 해서(웃음) 잘 얘기하지 않는 편인데, 여하간 저한테는 그런 내적 동기가 있었던 거죠. 
여하간 그렇게 한국의 문학 또는 예술에 많은 변화가 있었고, 저에게 많은 영향을 주게 된 것이었는데, 그런 식으로 영향을 준 한 사람을 꼽으라면,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라고 생각해요.  90년대 초에 무라카미 하루키 붐이 시작됐었거든요. 특히 대학생을 중심으로 해서 문화 쪽 지식인들을 통해 사회 전체에도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무라카미 하루키를 우리는 보통 하루키라고 부르잖아요? 우리가 외국 유명인들을 부를 때 성姓을 부르지 이름을 부르진 않거든요. 그렇게 보면 무라카미 하루키를 ‘무라카미’라고 불러야 하는데, 그냥 ‘하루키’라고 이름을 부릅니다. 애칭으로 좋아서라기보다는 하루키가 하나의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처럼 받아들여지는 측면이 있는 거죠. 
그럼 하루키는 어떤 사람이냐. 작가인데, 골치 아픈 현실에 대해서 진지하게 얘기하는 작가도 아니고, 현실의 어떤 문제든지 마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처럼, 중력을 이기는 것처럼 아주 가볍게 자기 상상력을 통해서 이야기를 하는 작가죠. 현실을 대면하면서 어떻게든 현실을 문학적으로 돌파하려고 했던 우리 80년대의 문학적 분위기하고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죠. 그리고 그런 문학 세계가 한국의 독자들에게 큰 영향을 줬던 이유는 삶의 방식에 대한 것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매일 한 시간씩 조깅을 합니다. 재즈 음악 좋아하고, 집에서 파스타 끓여 먹는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작가의 삶의 방식과는 완전히 다르죠. 맨날 밤새 술 먹고(웃음), 싸우고 그러다가 밤에 일어나서 제대로 쓰지도 못할 거면서 (웃음) 글을 쓰려하다가 사람만 괴롭히고 (웃음) 일제 때처럼 무슨 폐병이나 앓고 이러는 게 (웃음) 우리는 작가의 삶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무라카미 씨는 아주 건강하게 스스로 자족하는 삶을 사는 거죠. 그러니까 단지 작가의 삶이 아닌, 소위 ‘웰빙’이라는 개념조차 몰랐던 한국 사람들이 막연하게나마 저렇게 살고 싶어 하는 삶을 보여 주는 하나의 아이콘 같은 것이었죠. 그래서 그게 한국의 작가들뿐 아니라 많은 젊은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줬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들이 흔히 모더니즘이라고 말하는 삶의 방식, 삶의 편의를 위해 다리가 필요하면 다리를 놓고 하는 근대적 합리주의를 넘어서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하는 새로운 삶, 새로운 문화의 아이콘이나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전령 또는 전도사처럼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사실 저는 그 무렵, 그러니까 90년대 초 중반에 그런 게 너무 싫었어요. 세련된 척 폼 잡고 뭔가 멋있게, 쿨한 척하는 것들이요. 그래서 사실은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그런 소설은 나랑 안 맞아 이렇게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서 저와 같이 일하는 젊은 작가, 그러니까 90년대 무라카미 하루키 식의 문화적 환경 속에서 대학 생활을 한 작가인데, 그 친구가 했던 얘기 중에 인상적인 게 있었어요. 그 친구가 연세대학교를 다녔는데, 이한열 열사 이후에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게 맞아서 죽은 학생이 있었답니다. 그 학생의 노제를 지내는 데모 행렬을 학교 앞 카페에서 유리창으로 내다보면서 친구하고 무라카미 하루키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 90년대 초중반 한국의 상황이 그 장면에 축약돼 있는 것 같아요. 무라카미 하루키의 포스트모던하고 세련된 웰빙의 삶을 살고는 싶지만, 현실은 여전히 포스트모던에 다가가지 못하는 리얼리즘의 세계에 있는 상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이제 2010년대에 이르러서야 제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통해서 영화 관객들에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이런 세계를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 대해서 질문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제가 단순한 원작소설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선택했던 게 아니었던 것이죠. 
그리고 또 하나 재밌는 게,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 단편소설의 제목이 영어로 번역될 때 ‘Barn burning’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과 똑같은 제목의 윌리엄 포크너의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윌리엄 포크너는 1940~50년대 활동하신 미국의 대표적인 작가인데, 미국 남부의 미시시피 강 주변의 가난한 민중들, 백인이거나 혼혈들 흑인들 이런 고통 받는 민중들의 삶을 주로 소설에 담아낸 분입니다. 윌리엄 포크너는 노벨 문학상을 받으면서도 시상소감에서 “문학이란 모름지기 고통 받는 사람들 곁에서, 아무리 고통 받으면서도 굴복하지 않는 인간의 영혼을 위해서 작품을 써야 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게 포크너의 문학관이기도 하고, 전통적인 문학의 가치, 문학의 역할이라고 생각해 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문학이란 현실에서 힘들어 하는 민중들과 고통 받는 영혼을 위해서 그것들을 구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인데, 문학의 가치를 굉장히 높은 데 두고 있는 것이죠. 그런 것 때문에 저도 문학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80년대에 고민했던 것도 그런 비슷한 생각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미국뿐만 아니고 우리의 전통적인 문학에도 있었죠. 그런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인간의 가장 밀도 있게 인간의 가장 깊숙한 내면의 세계까지 들여다 본 문학 중 하나를 꼽으라면 윌리엄 포크너의 작품을 꼽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같은 제목으로 전혀 다른 단편소설을 무라카미 하루키가 쓰게 됐던 거죠. 윌리엄 포크너의 「반 버닝」이라는 단편소설은 미시시피 강 유역의 가난한 소작농 백인가족 중 어린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일 년에 한번 가족들을 마차에 태우고 어느 농장엘 가서 일 년 동안 일을 해주고는 소출을 받고 다시 농장을 떠나는, 그런 뜨내기 가족인데, 아버지가 하도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하니까 그때마다 상대 농장의 헛간을 태워버립니다. 복수를 하는 거죠. 일본의 헛간은 굉장히 작습니다. 농민들이 농기구 따위를 들여 놓는 작은 헛간이죠. 그러나 미국의 헛간은 전혀 다릅니다. 굉장히 큰 양철로 된 헛간인데, 그걸 태우는 거죠. 그래서 어린 아들이 항상 죄의식을 느껴요. 그것 때문에 지역 판사 앞에 증인도 서요. 그러면 거짓말을 해야 하니까 더 죄의식을 느끼는 거죠. 그러다가 어느 날 아버지가 또 억울한 일을 당하고는 또 헛간을 태울 것 같아서 이 아들이 미리 농장주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그날 밤 아버지가 헛간을 태우러 갔다가 총 맞아 죽는 것처럼 결말이 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와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죠. 고통 받고 분노한 아버지를 둔 어린 아들의 죄의식에 관한 이야기인 거죠. 그런데 왜 하필 똑같은 제목을 썼을까요? 우연의 일치일까요? 무라카미 씨는 우연의 일치라고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왜 이랬을까요? 무라카미 씨의  「헛간을 태우다」가 영어로 번역되지 않았습니까. 번역 되기 전 첫 번째 버전에는 공항에 여자를 마중 나갔는데 비행기가 두 시간 연착을 해서 공항에서 작가가 책을 보는데, ‘윌리엄 포크너를 읽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번역할 때 번역자가 작가한테 바꾸자고 얘기를 했답니다. 그래서 ‘잡지 두어 권을 읽었다’로 바꿨다고 합니다. 새로 나온 번역본에는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포크너의 소설과 똑같은 제목의 소설을 쓰면서 왜 하필 공항에서 책을 읽게 하면서 ‘윌리엄 포크너를 읽었다’라고 했을까요? 저는 의도라고 봅니다. 그 의도는 뭘까요? 제 짐작입니다만, 무라카미 씨는 국제적으로는 가장 인기 있는 작가일지 몰라도 일본 주류의 평단에서 평가 받는 작가는 아닙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만, 꽤 오랫동안 그래왔었습니다. 일본의 주류 평론가들은 식민시대 이후의 새로운 문학을 펼치는 사람들인데, 대표적인 사람이 가라타니 고진입니다. 그 사람들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은 문학의 본령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죠. 
문학의 본령이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습니다. 일종의 전통적인 문학관에 충실한 작품들, 예를 들면 오에 겐자부로 같은 분들이 그런 작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작가들이 문학적 근원을 누구에게 찾느냐 하면 바로 윌리엄 포크너입니다. 그들 자신이 윌리엄 포크너의 혈통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사실 작품 세계도 상당히 비슷합니다. 그래서 아마도 제 상상에 하루키 씨는 ‘그래 당신들이 섬기는 높은 수준의 문학의 대부인 윌리엄 포크너와 같은 제목으로 나는 이런 소설을 쓸래!’ 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하루키가 그들을 조롱하거나 폄하하는 건 전혀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하루키 씨는 피츠제랄드나 레이먼드 카버 등 일상을 문학적으로 잘 담아낸 작가들을 자기가 번역해서 소개하기도 하고, 그 작가들을 매우 좋아합니다. 포크너도 당연히 높이 평가하겠지만, 나는 이런 소설을 쓸 거야, 라는 일종의 문학적 선언의 일종으로 그러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러니까 같은 제목 하에서 굉장히 다른, 완전히 서로 상반된 문학적 태도를 가지고 있는 두 작품이라는 걸 알 수가 있겠죠. 그래서 저는 무라카미 씨의 작품을 원작으로 하긴 했지만, 그것과 이어진 윌리엄 포크너의 세계도 같이 대화를 했으면 했어요. 그래서 지금 우리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시대, 세련되어지고 편리해지고 쿨해진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삶은 변함없이 고통 받고 현실의 문제로 여전히 씨름하고 거기에 따르는 죄의식과 욕망의 문제들이 뒤섞여 있는 포크너의 세계와 연결돼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게 단순한 원작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텍스트로써 영화 속에 들어와 있고, 그 텍스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일종의 메타서사적인 메타픽션적인 그런 성격의 영화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이야기가 길어졌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을 잠깐 보도록 하겠습니다.

― ‘버닝’ 일부 감상 ―

보시다시피 아프리카에서 만나서 같이 들어온 남자, 이름이 벤입니다. 주인공 종수와 자기는 했지만 서로 사랑하는지 아닌지도 잘 모르는 그런 혜미가 데려온 남자입니다. 그 남자가 혜미와 함께 자기 집에 찾아와서 대마초를 피우고 여자는 벌거벗고 춤을 추는 그런 장면입니다. 원작과는 설정도 많이 바뀌어 있죠. 저 벤이라는 남자가 과연 어떤 남자일까요? 이 장면 이후엔 혜미가 다시 나타나지 않는데, 주인공이 혜미를 찾는 과정이 다음에 이어집니다. 왠지 저 친구, 벤이 혜미를 죽이지 않았을까. 쓸모없는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것이 자기가 보기엔 쓸모없는 인간을 죽인다는 뜻이 아니었을까, 이런 의심을 하게 되는데, 그게 소설가 지망생다운 상상력과 망상이 결합하면서 점점 의심이 깊어지는 겁니다. 그러면서 파국에 이르게 됩니다. 일종의 미스터리 스릴러의 틀을 갖췄다고 볼 수 있는데, 보통 스릴러 영화들은 의문의 사건과 미스터리를 하나씩 하나씩 인과관계에 의해 해결해 나가는 과정으로 되어 있죠. 물론 범인이 끝까지 잡히지 않는 영화도 꽤 있습니다만, 어떤 사건을 해결해 가고 그것을 합리적으로 이해하려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 게 대부분입니다. 근데 ‘버닝’은 조금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끝까지 알 수 없게 되어 있죠. 그런데 끝까지 알 수 없다는 것은 그냥 범인을 밝히지 않는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 차원입니다. 왜냐하면 웬 정체불명의 남자가 대마초에 취해선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게 취미라고 말하는데,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게 대체 뭐지, 그리고 그게 여자가 없어지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 거지, 하는 그 사건의 미스터리에 머물지 않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미스터리와 연결되어 있는 그런 구조로 되어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벤이라는 남자가 어떤 남자인지 끝까지 알 수 없죠?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일 수도 있고, 그냥 서래마을 사는 돈 많고 여유 있고 심지어 인간적이기까지 한, 굉장히 매력 있는 그런 남자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인지 알 수가 없어요. 친구들도 보면 나름 교양 있고 전문직에 종사하고 여유 있게 삶을 즐기면서 살고 있죠. 그런데 결국 종수는 상상력과 망상에 시달리고 의심하면서 결국 그것이 폭발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저 친구가 연쇄살인범일 거다, 저 친구가 혜미를 없앴을 거다’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 아니고, 저 친구가 누구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분노가 폭발하는 겁니다. 이 돈 많고 여유 있고 세련된 친구가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은 종수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알 수 없다는 것과 같은 것이죠. 
요즘 젊은 청년 세대는 취직도 잘 안되고, 점점 경제적으론 살기 어려워지면서 개인은 시스템 안에서 왜소해지고 무력감을 느끼고 있는데, 그 원인이 뭔지는 알 수가 없어요. 우리가 젊을 적에만 하더라도 세상은 뭔가 문제가 있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공유라고 있었어요. 문학을 하면서 고민도 하고, 학교 밖에 나가서 경찰과 싸우기도 하고 그랬지만, 그때의 대상은 굉장히 분명했습니다. 그게 독재정권일 수도 있고, 경제적 모순일 수도 있고, 불평등일 수도 있었죠. 한국뿐 아니라 근대 이후의 모든 역사는 어떤 방향을 가지면서 진보할 거라는 신념으로 이때까지 왔던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은 역사의 방향을 상실해 버렸죠. 세상은 점점 세련되고 편리해지고 멋있어지는데, 그 세련됨에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있습니다. 유재가 있는 이 삼청동이든, 제 사무실이 있는 합정이든 다들 멋있게 꾸며놓고 살긴 하는데, 원래 거기 있던 사람들은 어딘가 다른 데로 가버린 거죠. 그리고 그 사람들이 어디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아요. 그렇게 변해가는 거죠, 세상이. 이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징표예요. 젊은이들은 겨우 취직해서 열심히 살아도 생활비는 빠듯하고 더 이상 나아질 것 같지도 않겠다고 생각해요. 적어도 제가 젊을 때에는 미래가 현재보다 나아질 거라는 확신은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러나 지금 청년 세대는 역사상 처음으로 아버지 세대보다 못 사는 세대, 경제적으로 희망이 없는 세대일 겁니다. 이게 한국만 그런 게 아니고, 미국이나 일본, 유럽에서도 다 공감하는 사실입니다. 그런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종수의 눈에 이 세계가 마치 벤처럼 보이는 겁니다. 멋있고 쿨하고 여유 있게 사는 듯 보이는데 과연 이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혹시 연쇄살인범은 아닌지 의심이 드는 거죠. 그런데, 더 미치는 것은 알아낼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벤이라는 인물이 만약 악인이라면, 아마도 새로운 족보의 악인일 겁니다. 요즘 영화에서 사이코패스로 양산되고 있는 그런 악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문학적으로는 19세기 이후 근대에 새롭게 탄생한 악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오는 둘째 아들 이반 같은 악인 - 무신론자이고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하면서도 도덕 같은 것은 무시할 수 있는 그런 인간형이죠. 아버지를 살해(교사)하는 역할을 하는 인물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비슷한 시대에 미하엘 레르몬토프라는 작가가 있는데, 그 작가가 쓴 『우리 시대의 영웅』이라는 소설이 있어요. 거기에 나오는 페초린이라는 인물은 이유 없이 악행을 합니다. 굉장히 무서운 사람이죠. 굳이 얘기하자면 그 내면에 알 수 없는 공허감이 맴도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줍니다. 레르몬토프는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문학적으로 충분히 평가 받지 못했지만, 제 생각엔 굉장히 앞서 가는 소설을 썼다고 봅니다. 만약에 이 벤이 그런 인물, 그런 악인이라면 페초린 같은 인물이 아닐까 싶어요. 내면의 공허감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는 인물인 거죠. 벤 역을 맡은 스티븐 윤이라는 배우는 미국에서 활동하는 배우인데, 이 친구를 캐스팅하려고 했을 때엔 시나리오가 영어로 번역이 안 됐었기 때문에 원작을 읽고 오라고 했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만나서 얘기를 하는데, 자기는 벤의 내면에 있는 것이 공허감인 것 같다고 하더군요. 한국말이 그렇게 유창하지 못하기 때문에 ‘emptiness’라고 얘기하면서 자기는 그걸 잘 알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한국계 미국인으로 무명배우 생활을 하면서 힘들게 살다가 갑자기 인기를 얻고, 돈을 벌고, 희망을 가지게 되니까 오히려 존재적인 위기를 느끼면서 공허해지더라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 때 이 배우가 벤 역할에 맞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시나리오에 있는 벤이라는 인물이 실제로 앞에 앉아 있는 것 같았어요. 저는 ‘버닝’에 나오는 종수나 벤이 계급도 다르고 경제적인 형편도 다르지만, 지금 청년 세대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중요한 코드가 ‘공허감’인 것 같아요. 실제로는 벤이 연쇄살인범이 아닐 수도 있잖아요? 그저 돈 많고 세련된 젊은이일 수 있는데, 만약 그렇더라도 그런 친구가 꼭 연쇄살인범과 다른 인간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요? 방금 보신 장면 바로 앞에 종수가 벤에게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었을 때 “그냥 놀아요.”라고 대답하면서 “요즘은 노는 것과 일하는 것이 구분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돈은 굉장히 많죠. 포르쉐 타고 다니고. 이런 유형의 인간이 만약에 연쇄살인범이 아니라면 아마도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오는 ‘최후의 인간’ 같은 인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거기 보면 ‘초인( Übermensch) 이 나타나기 전에 ’최후의 인간‘이란 말이 나옵니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 일과 놀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자기의 작은 행복과 쾌락을 즐기면서 살아가는 그런 인간이 최후의 인간이다”라는 거죠. 그랬더니 듣고 있던 청중들이 와 그 사람 좋겠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 인간은 어떤 인간인 것 같습니까? 지금 오늘날의 우리 모습 같지 않습니까? 만약 벤이라는 인간의 족보를 찾아보면, 레르몬토프의 페초린 같은 인물일 수도 있고, 카라마조프의 이반일 수도 있고, 요즘 이유 없는 살인을 저지르는 수많은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의 계보일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론 너무나 멀쩡하게 생기고 세련되고 교양 있고 유복해 보이는 요즘 젊은이의 모습일 수도 있을 겁니다. 
방금 여러분이 보신 장면에 홍수가 나서 사람이 떠내려가는 걸 얘기하면서 그게 ‘자연의 도덕’이라고 말하죠. 사람이 무슨 사고가 나서 죽게 되더라도 그게 ‘자연의 도덕’이라는 거죠. 일종의 밸런스라는 겁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어야 한다는 것. 누군가 고통 받고 누군가 굶어 죽는다 하더라도 누군가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나는 그런 밸런스를 맞추는 게 ‘자연의 도덕’이라는 식으로 얘기하는 거예요. 이런 논리는 마치 신을 흉내 내는 것 같지 않습니까? ‘자연의 도덕’을 말하면서 동시존재 - 서울에도 있고, 아프리카에도 있고, 파주에도 있다면서 어디에나 편재하는 유비쿼터스 -는 신만이 할 수 있는 거죠. 어떻게 보면 그게 신일 수도 있고, 어쩌면 자본일 수도 있어요. 자본의 논리에선 어디에서나 동시존재로 작동하고, 약육강식의 자연 원리처럼 누군가 죽어가는 동시에 누군가 태어나는 순환을 이루고 있다는 식의 논리가 가능하죠. 어쩌면 이 친구는 일과 놀이를 구분하지 않고 많은 돈을 버는 일종의 펀드매니저일 수도 있고, 부동산 기획 같은 걸 할 수도 있을 텐데 그렇다면 이 친구는 공항 라운지 같은 데서 키보드를 두드리며 구조조정을 할 수도 있겠죠. 그러면 그 키보드를 통해서 수천 수백의 노동자들이 삶의 터전을 잃기도 하겠죠.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다 하더라도, 수많은 생명의 삶의 조건을 박탈해 가는, 연쇄살인범 이상의 무서운 인물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마치 ‘자연의 도덕’을 행하는 것처럼 아무 죄의식도 느끼지 못하면서 말이죠. 어쩌면 지금 우리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목숨이나 생명은 가까이 있는 것보다 멀리 있는 것이 훨씬 죄의식을 덜 느끼게 되니까요. 그땐 사람 목숨이 목숨처럼 느껴지지 않고 하나의 숫자처럼 여겨질 수도 있어요. 이게 어쩌면 ‘최후의 인간’의 삶인지도 모르겠어요. 
‘버닝’이라는 영화는 이렇듯 삶이 어느 방향으로 흐르는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답이 없어진 세상에 대한 영화입니다. 겉으로는 점점 세련되어 보이고 편해 보이고 심지어 멋있어 보이기까지 하는 이런 세상을 살면서도 개인의 삶은 더욱 왜소해지고 무력해지는 이런 이상하고 모호한 세상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거죠. 그런 세상에 대한 질문을 담고 있는, 그리고 예술이란, 영화의 서사란 이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는 것인지 그런 것을 묻는 메타픽션, 메타서사의 영화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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