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에 대하여 계속 또 모르는 듯 오래 다시 생각한다.
생명이란 자기 안에
결여를 품고 있어서
그 결여를 채워줘야 한다
-영화 ‘공기인형’ 중에서
‘생명’을 사랑한 자연주의 시인,
‘프란시스 잠’을 읽는다.
생명(生命)이란 무엇일까. 뻔히 알고 있다고 믿었던 그 단어를 다시 발음해보니 체감할 수 있는 게 없다. 늘 반복되는 반성이다. 어쩌면 내가 안다고 착각했고 다시 보니 모르는 물질 같기도 하다. 공기인가. 살아가고 있는 몸인가. 실체가 있기는 한 것인가. 이토록 생소한 단어로 보이는 게 놀랍고 낯설다. 생명, 우리가 말하는 그 생명은 대체 무엇일까. 그 단어의 끝에서 한 시인을 만난다. 프란시스 잠(1868-1938). 평생 생명과 사랑을 노래한 자연주의 시인. 그는 훗날 농부의 삶을 살았다. 고통을 위로하고 겸손했으며 온화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시집 서문에 “나는 지금 장난꾸러기들의 조롱을 받으며 고개를 숙이는 무거운 짐을 진 당나귀처럼 길을 가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당나귀를 무척 좋아해서 당나귀의 친구이자 당나귀 시인으로 불리는 프란시스 잠. 그는 위태로운 시대의 영혼을 어루만지는 치유의 시인으로 읽히고 삶의 아름다움을 계속해서 되뇌는 시인인 것 같다. 윤동주 시인과 백석 시인이 사랑한 시인, 프란시스 잠. 그의 영향이었을까. 윤동주의 시「밤」에도 당나귀가 등장하고, 백석의 시「나와 나타샤와 당나귀」에도 등장하는 당나귀.
윤동주는 프란시스 잠의 시를 열심히 필사했으며, 필사한 노트 옆에는 “구수해서 좋다”라고 썼다고 한다. 연희전문학교 시절에는 잠의 시집『밤의 노래』(‘새벽의 삼종에서 저녁의 삼종까지’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를 늘 간직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소설, 『말테의 수기』에서 청년 말테가 반한 시인은 당대 최고의 파리 시인들이 아니었고 맑은 공기 속에 울려 퍼지는 종소리 같은 시인, 프란시스 잠이었다. 윤동주 시인의 시 「별 헤는 밤」을 자주 읽었으면서도 나는 이제야 그 시에 등장했던 프란시스 잠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당나귀의 시인. 당나귀를 그토록 사랑한 시인이. 그럼 이제 프란시스 잠을 시에 쓴 윤동주와 백석을 읽어보자. 그들은 어떤 마음으로 그를 시에 등장시켰는지 느껴보자.
외양간 당나귀 앙 앙 외마디 울음 울고
당나귀 소리에 으아 아 애기 소스라쳐 깨고
등잔에 불을 다오
아버지는 당나귀에게 짚을 한 키 담아주고
어머니는 애기에게 젖을 한 모금 먹이고
밤은 다시 고요히 잠드오
-윤동주 「밤」 전문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란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윤동주 「별 헤는 밤」 중에서
하늘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란시스 잠’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흰 바람벽이 있어」중에서
프란시스 잠은 릴케, 말라르메, 뿐만 아니라 윤동주와 백석에게도 뜨거운 사랑을 받았다. 그를 사랑하는 시인이 무척이나 많았다. 나는 그가 ‘생명’을 사랑한 시인이었다는 점에서 다시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자연주의 시인이자 농부였던 시인. 그를 나도 뒤늦게 사랑하게 된 것일까. 프란시스 잠. 그는 어떤 시를 쓰는 시인일까? 그의 시를 한 편 온전히 읽어보자. 나는 그의 시에 나타나는 사물과 생명체에 의미를 부여해보고자 한다.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나무 병에 우유를 담는 일
꼿꼿하고 살갗을 찌르는 밀 이삭들을 따는 일
암소들을 신선한 오리나무들 옆에서 떠나지 않게 하는 일
숲의 자작나무를 베는 일
경쾌하게 흘러가는 시내 옆에서 버들가지를 꼬는 일
어두운 벽난로와 옴 오른 늙은 고양이와
잠든 티티새와 즐겁게 노는 어린 아이들 옆에서
낡은 구두를 수선하는 일
한밤중 귀뚜라미들이 날카롭게 울 때
처지는 소리를 내며 베를 짜는 일
정원의 양배추와 마늘의 씨앗을 뿌리는 일
그리고 따뜻한 달걀들을 거두어들이는 일
-프란시스 잠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
프란시스 잠의 시를 읽다 보니 어떤 생동감이 삶을 지탱해주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된다. 행위자는 인간이지만 인간은 무엇에 의해서, 무엇을 얻고, 무엇 때문에 호흡하고, 무엇을 통해 인간임을 확인하고 있다.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일지라도 그 위대함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닐까. 젖소 (우유), 밀이삭 (땅), 암소, 자작나무, 시내(강), 버들가지, 가끔 끼어드는 고양이(체온), 티티새(새들의 노래), 귀뚜라미, 포도주(시간), 양배추, 마늘, 씨앗, 달걀(닭의 선물). 인간은 생명체이지만, 그 생명체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수많은 시간과 사물과 생명을 지탱할 수 있게 해주는 다른 생명체들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 나는 그 당연한 것을 프란시스 잠의 시에서 다시 읽는다.
욕망의 반대쪽을 들여다본다. 욕망은 아이러니하게도 결여의 뒤 페이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욕망은 어떤 질감이며 어떤 것을 포함하고 있을까. 우리가 꿈꾸는 것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이거나 내가 갖지 못한 물질이거나 정신인 경우가 많다. 의식은 가치를 창조하기를 원한다.
그것이 욕망의 민얼굴이다. 시인은 창조의 생명력을 부여받은 존재이며 대상을 통해 진부하지 않으면서 적확한 언어로 사유의 결과를 만들어내야 한다. 시인은 상투적인 언어와 치열하게 싸워야 하며 그러면서도 보편적 정서를 위한 표현을 찾기 위해 예민하게 반응해야 한다.
시가 개인적인 독백으로만 끝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시인 스스로 내면의 근거와 진정성에 대하여 고민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 지점에 ‘생명’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의식을 구성하고 있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일은 그 첫 번째 작업이 되어야 한다. 이전에는 그토록 평범하게 읽혔던 프란시스 잠의 시가 내게 깨달을 수 있는 행간을 열어준 것은 참 다행이다. 인간의 욕망, 그리고 당연한 듯 여기며 살았던 욕망과 삶의 연결고리들. 그것들은 당연한 게 아니었으며, 당연하지 않게 여기는 마음에서 생명에 대한 ‘감사’가 비롯된다.
그렇다면 인간의 욕망에서 방향을 조금 달리해보자. ‘결여’의 기여에 대해서. ‘결여’를 살펴보면 기억과 상처에 관하여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은 기억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는 존재다. 언젠가 맡았던 냄새, 어느 요일의 날씨, 어떤 맛, 어떤 말. 이것들로 인해 시인은 종일 회색빛을 드리운 채 슬플 수도 있다.
그러나 고쳐 생각해보면 기억과 상처는 우리 삶에 이바지한다는 것. 힘들었던 기억은 한 단계 앞길을 열어주고 곪았던 상처는 다시는 그 상처를 반복하지 않도록 방어기제를 키울 힘을 지니게 해준다. 그리고 거기에서 시인의 내면의 장소가 드러나고 일상의 사소한 것들이 호흡을 얻는다.
일상의 체험들로부터 끊임없이 축적하는 기억과 상처는 대상을 바라볼 때 편견을 버리게 하는 동력이 되고 숨겨진 의미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척이 된다. 기억은 심상(心象)의 풍요에 이바지한다. 그러나 그것은 ‘공감’의 교집합을 이루어 낼 때 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것은 시인의 개인적인 체험이 궁극적으로 향해야 할 지점에 대한 물음이기도 한다. 각각의 시인들의 ‘내면의 장소’는 고유한 개성을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그 장소가 보편적일 수는 없겠지만 개인의 일상이 깃든 그 내면의 장소를 통과해 공감의 장소로 나아갈 수 있을 때 시는 더 생명력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자신을 의심하는 자세로 대상의 본질을 바라볼 수 있는 관조의 태도와 반성, 자각, 치열한 사유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는 그 지점에 바로 ‘생명’의 탯줄이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다고 믿는다.
미늘을 삼킨 듯 그 바늘을 목구멍에 걸고
꼭대기 쪽으로 이동을 하고 있는 것이라 여겨지며 지속되던 한때
심각한 얼굴로 아이 손을 잡고 귀가하는 한 무리의 여자들
그믐을 만지는 손들이
데리고 가는 그곳에는 모르는,
가득한 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무엇이 가득한지를 모르는,
창고라 한다
행운이거나 선물이거나 무기
모르는, 흉기가 될 이미 받은 모르는,
받지 말아야 하는 것들에 대해
기합 소리가 단체를 만드는 일에 대해
허리가 ㄱ자로 꺾인 노인의 그 남은 날이 남의 일이 아니듯이 모르는,에 살고 있고
실로폰 소리 위의 봄밤,
누가 죽었는지 모르는, 보이지 않고 모르겠어
지워보려고 지울 수 있는 것은 지우고 나서 보려고
가눠보려고 가눌 수 있는 것은 가누고 나서 보려고
나눠보려고 나눌 수 있는 것은 나누고 나서 보려고
더 불쌍한 사람이 죽고
죽음으로 용서되는 일도 있지만
상자는 여섯 개
하루가 비고
빈 것을 아는 것만으로도 1년에 마흔여덟 개쯤 모르는,
계절은 다르게 숨긴다
과장된 어깨는 스스로 많은 걸 데리고 온 줄 알지만
모르는, 앞에서 사라지고
모르는, 에 의해 의외의 것에 기대를 걸고
아이는 아이답고 벌레는 벌레답고
바람은 어느새 푸른 쑥으로 자라 진초록
나는 모르는,
거미의 노래를 개미가 듣고
벌레의 이동을 흙과 바람이 돕고
땅은 휘둘리지 않으며
아니다 그렇지 않다 말하지 않으며
모르는, 집요하다
-황혜경「모르는, 집요하다」
삶은,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명체와 더불어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모른다. 갈수록 모르겠다. 시는 쓸수록 모르겠고 삶은 살수록 더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세계가 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고, 부여받은 생명을 지니고 충실하게 살아가는 수많은 생명체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나는 정확히 본 적도 없고 알지 못한다.
파브르 곤충기를 읽듯 더듬더듬 관심이 가는 생명체들을 찾아보고 알아가긴 하지만 그들의 생활이 어떤지,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무얼 먹고 사는지, 아침부터 밤까지 그들의 시간은 어떠할지 짐작할 수도 없다. 나는 인간이다. 나는 인간이지만 ‘생명은 소중하다’라는 명제를 어디까지 적용하며 살아가고 있나. 인간이 이 땅의 수많은 생명체와 더불어 산다는 것은 어떤 언어로 표현되어야 할까.
어릴 때 마당에서 개미를 보면, ‘어서 도망가’라고 말하며 그 개미가 개미굴로 들어갈 때까지 기다려줬던 내 마음은 지금도 유효한가. 인간이기 때문에 생활 속에서 알게 모르게 저지른 일들이 다른 생명체들에게 끼치는 악영향은 얼마나 집요하고 지속적일까. 복잡한 생각들이 계속 또 모르는 듯 오래 다시 지나간다. 더불어 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 나는 죽기 전까지 그 문제에 확고하게 답을 할 수 있을까.
아는 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리고 계속 들려오는 부음. 산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어제 본 사람도 오늘 떠날 수 있는 것이었다. 며칠 소파에 붙어 꿈쩍하지 못하는 몸뚱이. 이것은 몸이 누운 것인가. 정신이 누운 것인가. 나는 침묵 속에서 색연필을 깎는다. 사방이 색깔을 입길 바라며. 더 솔직하게는 나의 마음이. 오늘 나는 밟히면 밟히는 대로, 대자연 앞에 선 개미 같은 존재가 된다. 삶이란 이렇게 위축되거나 과잉인 것을 조절하려는 제스처와 뉘앙스를 부른다. 또 살아가기 위해서다. 태도와 손짓과 몸짓. 인간은 이 몸을, 이 손을, 이 발을, 이 마음을 어떻게 관장하며 살아야 할까. 빈 곳을 채우는 노력으로, 공기가 없어 숨 쉬지 못하는 생명체들에게 호흡을 나눠주는 마음으로 우리는 여러 곳을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며 살아야 할 것이다. 생명과 사랑은 거기에서 새롭게 시작될 것이다. 나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시를 통해 호흡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창작 수업을 진행한다. 아이들과 시 수업을 하면서도 여리고 고운 아이들에게서 자주 생명력을 나눠 받게된다. 아이들은 ‘나무’로, ‘햇빛’으로, 언어의 그림을 생생하게 그리기도 한다. 모든 생명은 살아가는 동안 집을 짓는다. 그것은 어쩌면 ‘곳’이거나 ‘시간’일 수도 있다. 저마다 자연스러운 그것들이 섣불리 훼손되지 않기를.글 황 혜 경
시인. 방송작가. 아트컴퍼니 「나는 우리」 대표. 시집 『느낌 氏가 오고 있다』(2013. 문학과지성사), 『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2018.문학과지성사), 『겨를의 미들』(2022.문학과지성사). ‘사람’과 ‘사랑’에 대하여 뒤늦게 수많은 발견을 하고 그래서 더 많은 실천을 바라는 사람.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오래된 꿈을 이루고자 움직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