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쉬는 지구와 예술_그리고 있다! 잇다, 지구인(人)과 예술인(人)’
모든 아이는 예술가로 태어난다 (파블로 피카소)
‘지구’와 ‘사람’과 숨을 쉬는 ‘예술’에 대하여 한 번쯤은 이제 우리가 이야기를 시작해봐야 할 때인 듯하다. 저 공활한 하늘 아래, 이 광활한 대지 위로 혼자 터벅터벅 걷고 있는 것 같을 때, 아무도 없을 때 들려오는 언젠가 들은 적 있던 익숙한 음악 소리, 나지막한 사람의 목소리, 또는 생경한 장면이 주는 느닷없는 환기. 마주 앉아 체온을 나누는 대화의 온도, 지구 안에서 우리는 ‘우리’이기를 바라면서도 먼저 손짓하기가 쑥스럽고 어려워서 더 고립되는 순간들이 참 많다는 것을 우선 고백한다. 모르는 것이 많아도 가진 게 없어도, 같은 마음으로 모여드는 우리는 남들이 모르는 특별한 ‘우리’를 이룰 수도 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더 많아진다는 것을 믿음처럼 결심한다. ‘지구와사람’에서 사람과 예술이 도모하는 상생의 호흡, 그 ‘마당’에 발을 들여놓고 온전히 참여하며 더 자세히 관찰해보려고 한다.
지구, 그리고 사람과 두 가지 행사, ‘펼쳐진 구 Unfolding Text’와 ‘보트 피플’ 속으로 깊이 들어가 보고자 한다.
펼쳐진 구 Unfolding Text
_예술인(人)이 하나, 둘, 모여들고 예술을 통해 ‘자연의 권리’를 ‘감각’하게 하다.
“우리가 이 태초에 설계를 볼 수 있는 시간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양피지에 쓰인 글자처럼, 나중에 쓴 글자를 지우면 본래의 글자가 나타나는 것과 같다.” (토마스 베리『지구의 꿈』)
“곰팡이는 어떤 것의 죽음으로부터 자신을 시작한다.” (이유리 ‘곰팡이 읽기_인터랙티브 픽션게임’)
시작과 끝에 대해 인간은 늘 결심하고 두려워하고 다시 시작하는 가변적인 존재다. ‘항상’과 ‘향상’ 사이에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보잘것없는 곰팡이의 생명력을 바라보다가 우리는 또 ‘나’를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다 아는 시간이라고 믿었던 시간이 사실은 저 너머에 진짜로 똘똘 뭉친 본래의 시간을 은밀하게 지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2021년 11월 17일부터 11월 21일까지 진행된 전시「펼쳐진 구 Unfolding Text」는 예술인파견지원사업-예술로에 참여한 예술가들이 ‘지구와사람’과 함께 추진한 동명의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는 결과 보고전(展)이었다. 생태 문명을 모색하는 모임인 ‘지구와사람’은 토마스 베리가 창안한 지구법학을 토대로 자연의 권리를 현실화하는 거버넌스 시스템을 연구하며 보다 많은 생명들을 ‘사람’(소위 원주민 사상에선 영이든 동물이든 인간이든 감각을 가진 모든 존재를 사람(person)으로 본다)으로 불러 모으고 있다. 이 모임의 최근 문화예술에 대한 고민-예술이 어떻게 우리 생태 운동에 숨을 불어넣을 수 있을까? *이다. 이 질문에 대해 예술인파견사업에 참여한 5명의 작가는 각자의 방식으로 충실하게 대답했다. 그 작품을 통해 우리는 감사하게도 자연의 권리를 직접 보고 듣고 느끼며 구체화 시키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예술은 숨을 쉰다. 자연 속에서, 사람들 속에서. 그 더듬이는 감지하고 억눌린 것들을 꺼내주는 부드러운 핀셋 같은 것이기도 하다. 호흡이라는 것은 그것과 닮아있다. 서로에게 흘러들어 섞이고 간혹 손을 번쩍 들어 반대하기도 하고 저항하고 그 저항이 내면의 힘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서로 응원하면서 흐르는 것이다. 사람이 예술과 할 수 있는 것도 그것과 닿아 있다. 이상적인 삶과 불행한 삶, 꿈과 현실, 희극과 비극, 인간과 동물, 자연과 사람, 인공과 자연. 예술은 이 모든 것들을 품어 안을 수 있다. 고정된 가치와 느낌을 과감하게 전복시킬 수 있고 이미 축조된 것들을 허물고 ‘근본’과 ‘원시’를 향해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게 해준다. 5명의 작가가 마련한 전시의 마지막에는 생태신학자 토마스 베리가 쓴 책『지구의 꿈』의 문장들이 적힌 쪽지를 하나씩 뽑아서 돌아가며 한 명씩 낭독하는 시간을 가졌다. 사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그 시간, 그곳이 그대로 ‘자연’이었다.
‘첫’
‘지구와사람’이 만든 첫 창작극 〈보트 피플〉그 보트는 ‘생명의 의지’로 전진한다.
“이 연극은 2021년 지구와사람에서 제작하였으며 ‘예술’이라는 ‘시야’로 지구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방식을 탐색해보고자 한다.” ‘닐루’라는 지구의 정령, 삶을 방황 중인 ‘강노아’, 과거를 항해 중인 ‘아메드’, 안정된 삶에서 혼란을 맞닥뜨린 ‘명자’, 새로운 항해를 제시하는 ‘오교수’를 통해. 그리고 이 연극을 마주하는 우리 자신을 통해. _연극「보트피플」연출자 (강영덕)의 변(辯)
곧 녹아내릴 마지막 빙하의 한 조각. 위태롭다. 때는 2029년 지구. 휩쓸리고 방황하며 혼란을 겪는 사람들. 벼랑으로 몰린 듯 8평 보트 위에서의 절절하고도 뜨거운 몸의 언어가 펼쳐진다. 라비앙 로즈를 부르는 재즈 보컬리스트의 낮고 깊고 무거운 중저음의 목소리로 연극은 시작된다. 붉은 장미 한 송이가 그녀의 손에서 몽환적으로 피어난다. 그녀의 몸짓과 그녀의 노래에 맞춰 바로 곁에서 몸으로만 말을 하며 연기 중인 배우를 통해 계속해서 무언가 붉게 붉게 뭉게뭉게 피어나고 있다. 잠식되어가던 것들에 피가 돌기 시작한다. 순환한다. 혈맥이다. 사람, 그리고 곁에 사람이 있다. 노래하는 사람, 연기하는 사람, 그리고 바람이 강하게 불고 보트 위에 서 있는 두 사람. 말을 주고받으면서 상대에 대해 힌트를 얻고 조금씩 알아가며 위태로움 속에 함께 있다. 그러나 둘은 둘이기에 더 가능해진다. ‘첫 사람’이 ‘첫사랑’을 만난 것처럼 빙하가 녹아내리는 바다 위에 둘은 표류하지만 ‘같이’ 있다. 이후, 여러 사람이 찾아오고 서로에게 필요하고 충분해지기도 한다. 보트는 계속해서 항해 중이고 그 보트는 ‘생명의 의지’로 전진한다. ‘지구와사람’에 사람들이 모여 만든 첫 창작극, 이번 연극을 통해 그 의지는 더 단단해졌을 것이라 짐작한다. 이전과는 다른 새롭고 강한 ‘첫’이다.
지구인(人)과 예술인(人)
‘꽃에는 꽃의 권리가, 강에는 강의 권리가 있다’라고 믿고 실천하고 있는 ‘지구와사람’은 예술을 사랑한다. 그런 마음들이 모여서 ‘지구와사람’의 공간인 유재 앞마당과 뒷마당에서는 사람을 보듬고 사람과 나란히 곁을 나누는 예술이 언제나 시작되고,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는 반성,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숨통이 트이면 주체를 옥죄던 것들이 자세히 보인다. 그리고 목매고 있는 대상도 보이기 시작한다. ‘지구와사람’에는 시를 사랑하고 미술을 사랑하고 연극의 의미를 진중하게 새기며 관람하고 같이 따뜻한 ‘밥’에 대하여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지구인이기도 하고 예술인에 가까운 사람도 많고 예술인도 많다. 그리고 화가가 화가일 수 있는 것도, 시인이 시인일 수 있는 것도 지구 안의 사람들, 그 다양한 삶의 모양을 읽어주고 창작자를 이해하고 지지해주는 그 많은 ‘좋은 사람’이 있어서 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주장하지 않고서도 우리가 받았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지구에 있는 존재들에게 사랑의 표현을 보태고 싶어진다. 지구가 예술에게, 예술은 지구에게 서로가 서로에게 더 넓어지고 더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전하는 ‘오늘의 말’일지도 모른다.
예술은 모든 생명에게 필요한 또 다른 언어는 아니었을까. 삶 속에 깃들어 있던 ‘숨’에 가까운 것. 그리고 사랑과 사람. 그 많은 각양각색의 이타적인 인간들이 사랑의 발생 과정에 참여한다. 엄마와 아빠와 아들과 딸과 언니와 동생과 형과 아우. 그리고 역할과 직함(職銜)을 가진 사람들. 그날 그 순간 그 공간과 시간에 예술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느릿느릿 그러나 더 가까이 서로에게 스며들고 있다. 가치관을 공유하는 느슨한 공동체. 급격한 변화를 요구하는 시대지만 생명에 관한 호흡은 한결같이 천천히 한 호흡, 한 호흡, 제대로 숨을 쉬어야 숨통이 트인다. 그것을 알기에 ‘지구와사람’은 할 수 있는 만큼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 가장 ‘자연스러운’ 도모를 꿈꾼다. 수동적인 흐름은 진짜 호흡이라고 할 수 없고 능동적으로, 자발적인 목소리로 나올 때 우리는 진짜로 우리가 될 수 있다. ‘지구와사람’과 지구와 사랑과 지구와 예술은 다 같은 한 몸이다. 그러므로 이런 말을 보태고 싶어진다. 반성하는 마음으로.
새도 나무도 강물도 꽃도 바람도
마음대로 부르지 않을래요
(중략)
그러니까 아무것도 불러들이지 않을래요
새도 나무도 강물도 꽃도 바람도 어둠도 빛도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적재적소(適材適所)에
그래서 나는 아무것도
-황혜경의 시「반성」 중에서
인간은 지구의 주인이 아니다. 인간 이전에 다른 생명체들이 그곳을 지켜냈다. 필자는 공룡을 좋아한다. 인간 이전의 공룡들이 초식, 육식, 다양하게 어우러져 땅을 지켜왔을 것이다. 공룡이 인간에게 바통을 넘겨준 것처럼 인간은 이제 다음의 생명에게 다 쓰지 않고 오염되지 않게 남겨둔 순수한 생명에 관한 이야기를 넘겨줘야 할 것이다. ‘지구와 사람’, ‘지구와 사랑’, ‘지구와 예술’. 이 모든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랑’이라는 큰 단어 안에 담아두고 간직하기로 하자. 대대로 변치 않고 전해질 단어들이 이것들이면 좋겠다. 지구. 사람, 사랑, 예술. 그리고 ‘숨’을 ‘잇다’ 그리고 모두 내내 아프지 않게 있기를.
글 황혜경
시인. 방송작가. 아트컴퍼니「나는 우리」대표.시집『느낌 氏가 오고 있다』(2013. 문학과지성사),『나는 적극적으로 과거가 된다』(2018.문학과지성사). ‘사람’과 ‘사랑’에 대하여 뒤늦게 수많은 발견을 하고 그래서 더 많은 실천을 바라는 사람. ‘쓸모’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오래된 꿈을 이루고자 움직이고 있다.
[월간환경] 3월호 "지구와사람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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