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9일, 생태신학자 데니스 오하라(Dennis O'Hara)를 초청해 토마스 베리의 "평화의 우주론(Cosmology of Peace)"을 주제로 대담을 가졌다. "평화의 우주론"은 토마스 베리의 『지구의 꿈』에 실려 있는데, 우주론적 과정의 폭력적인 면을 받아들이고 평화를 "적대감의 창조적 해결"로 이해하는 것이다. 토마스 베리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나 인간의 평화Pax Humana가 아니라 지구평화Pax Gaia가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인간을 포함해서 지구가 하나의 공동체임을 이해할 때 우리가 안고 있는 전지구적 생태위기를 대처해나갈 수 있다고 보았다. 데니스 오하라는 대담을 통해 새로운 비전으로 생태영성이 요구된다고 피력했다.
〈대담 요지〉
토마스 베리의 "평화의 우주론"에 관하여
나는 우주론적 과정의 폭력적인 면을 존중하며 '평화'보다는 '적대감의 창조적 해결'이라고 부른다. ... 폭력이나.. 평화는 그 어느 것도 우주의 보다 장려한 업적들을 이룩해낸 창조적 변형과 일치하지 않는다. ... 어떤 개인이나 어떤 문화를 위한 이상적인 상황은 '아둔한 평온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 유기체가 창조성을 낳을 수 있을 만큼의 최고의 긴장 상태'이다. - 토마스 베리, 『지구의 꿈』, p.326
우주의 폭력과 인간의 폭력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파괴와 폭력은 원시 특이점의 폭발부터 시작해 처음부터 생성하는 우주(cosmogenesis)의 일부였다. 이러한 우주적 폭력을 이해하려면 저항, 에너지, 꿈의 역할을 이해해야 한다. 사물은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줄이려는 모든 시도들에 저항한다는 것, 모든 존재는 존재하기 위해 에너지를 필요로 하며, 이는 반드시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라는 것, 그럼으로써 모든 존재는 자신의 내적 본성을 실현하려 한다는 것이다. 가령 수소는 결합을 시도하고, 도토리는 참나무가 되기 위해 필요한 물과 미네랄을 섭취하며, 매는 쥐를 사냥하여 잡아먹는다. 수소, 도토리, 매는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게 막으려는 저항에 도전하고, 그 도전에 필요한 에너지를 소비한다.
그러나 인간, 특히 산업화 이후의 인간은 저항과 에너지는 받아들이지 않고 꿈만 추구해왔다. 우리는 우리의 안전에 대립하는 모든 저항이나 위협을 회피하거나 제거하려 하며, 발전의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려 하는 반면, 욕망이나 꿈은 무제한적으로 충족시키려 하지 않는가. 그렇기에 우주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들이 저항, 에너지, 꿈에 관여하는 방식은 궁극적으로 우주를 강화하는 반면, 산업 시대 이후 서구 인류가 저항, 에너지, 꿈에 관여하는 방식은 지구를 쇠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럼에도 우주의 폭력은 우주 이야기의 긴 흐름에서 보면 창조적인 것으로 볼 수 있다. Pax Gaia는 인간이 만든 맥락이 아니라 우주의 맥락에서 이루어진다. 균형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상황에서 창조성이 가장 번성하고 새로운 역학이 놀랍고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여기에는 희생과 놀라움이 수반된다.
우주에 내재한 폭력에 대한 거부와 그로 인한 병리적인 세계관을 극복하고 우리에게 부과된 한계 안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자연에 내재한 폭력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는 자연스러운 적대감에서 나오는 하나의 대응이다. 그러나 공포의 증폭은 인간이 자신을 다른 피조물들과 분리된 존재로 여기도록 부추겼고, 그들을 악마적이거나 악의적인 존재로까지 간주하게 했다. 이러한 병리적인 세계관이 우리를 생태 위기로 내몰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적대 관계에 대응하여 자연을 두려워하고 물리쳐야 하는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Pax Romana), 우리에게 부과된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계 안에서 함께 번영할 수 있는 방법을 발명할 수도 있다(Pax Gaia).
캐나다의 아타바스칸 원주민들은 회색곰이 서식하는 생물권에 살고 있다. 18-19세기 식민지 개척자들이 최상위 포식자인 회색곰의 잠재적 위협 때문에 그들을 사살했던 것과는 달리, 아타바스칸은 회색곰과 공존하는 것을 선택했으며 서로의 한계를 존중해 왔다. 그들은 창조주가 그들과 회색곰을 같은 땅에 두어 종종 같은 자원을 두고 경쟁하게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적절한 경우에 곰을 제공한 창조주와 자신을 제공한 곰에게 감사를 표하며 회색곰의 목숨을 취한다. 그리고 신에게 벌 받지 않기 위해 곰의 거의 모든 부위를 음식, 의복, 의식용 제물이나 도구 등으로 사용한다. 이것은 자신들이 땅을 존중하지 않으면 땅도 자신들을 존중하지 않을 거라는 호혜성에 대한 믿음이다.
아타바스칸은 회색곰과 함께 살아가는 긴장감을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이 긴장감이 내면에서 창조성을 불러일으켜 땅과 더 깊고 상호 유익한 관계로 이끌기 때문이다. 긴장은 그들의 내면에 있는 영웅적인 면을 자극하여 정체성을 확인시켜 준다. 반면, 두려움은 정체성을 약화시키고 불안감으로 이어져 자신감을 잃게 만든다. 자신감의 결여는 '폭력'이 작동하는 생성하는 우주에서 살아나갈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우주에는 희생적인 차원이 있다. 우주 전체에 퍼져 있는 파괴와 폭력의 편재를 성찰하고, 이러한 파괴와 위대한 아름다움의 출현 사이의 신비한 관계를 돌아볼 때 우리는 비로소 이런 이해에 도달하기 시작한다. 생명은 본질상 많은 종류의 고난을 포함한다. 이 고난을 거절하는 것, 즉 이러한 정당한 고통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것은 존재를 약화시키는 선택이다. - 토마스 베리 · 브라이언 스윔, 『우주 이야기』, p.103
희생은 성취한 모든 것에는 대가가 따른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의 전체 산업 시스템은 우리의 안락함을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를 우회하기 위한 노력이다. 인류는 지구에 주는 것 없이 빼앗아 왔으며, 유익한 자원을 취하고 유독한 물질을 배출하고 있다. 생태대로의 전환을 위해 인류는 현재의 문화적 조건과 다른 방식으로 행동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 사회적 차원에서 현재로서는 용납할 수 없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희생을 감수하고 한계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동시에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희생"은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다른 이들을 착취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기후 위기나 생물다양성 위기라는 문제의식이 회의나 공포를 증폭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세계관의 출현에 이르는 영적 성장의 길을 내려면?
1980-90년대에 북미의 아이들은 환경 위기의 위협과 피해에 대해 광범위하게 교육 받았다. 그 결과, 그들은 자연을 적대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고 미래에 대한 절망과 허무감에 빠졌다. 심각한 생태 문제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진 것은 큰 발걸음이었지만, 그 전에 창조의 경이로움과 신비와 약속과의 연결을 느낄 수 있도록 도울 필요가 있었다.
이는 이야기를 통해서 잘 전달할 수 있다. 아이들의 상상력은 긴장감과 영웅성을 통해 더 큰 그림을 파악할 수 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지구가 역사를 통틀어 엄청난 위험과 도전을 안겨준 수많은 위기를 겪어왔다는 것, 하지만 인류의 산업 시대가 지구를 황폐화시키기 시작한 최근까지 지구는 이러한 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더욱 복잡하고 다양하며 활기찬 공동체로 진화해 왔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그럼으로써 생태 문제를 훨씬 더 큰 의미의 지평 안에서 자리매김하는 데 맥락을 제공해야 한다. 아이들은 생태 문제를 세세하게 배우기 앞서 우주 이야기의 영웅적인 차원과 그들이 어떻게 그 위대한 서사시의 일부인가를 배워야 하는 것이다.
팬데믹과 기타 인수공통전염병 등 생태계의 위기로 인한 불안에 직면한 지금, 생태영성은 산업화 시대의 400년보다 훨씬 긴 수십 억 년 동안 번성해온 지혜가 있음을 상기시켜 준다. 생태영성은 우리가 지구의 과정에 의해 탄생하고 유지되었기 때문에 지구와 피할 수 없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우리 역할의 한계가 잔인한 구속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보다 더 큰 공동체와 지혜의 일부임을 보장한다는 사실, 그리고 변화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지구의 발전 역학에 자연스럽게 포함되는 변화를 가져오기 위해 우리가 창조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최대한의 긴장을 추구하는 것이, 토마스 베리가 이해한 Pax Gaia이다.
※ 데니스 오하라를 생태신학자로 이끈 "결정적인 순간"
“신학 석사 학위 지도교수님 추천으로 『지구의 꿈』을 읽었을 때, 저는 베리의 주장에 분노했습니다. 인간만이 영성을 가질 수 있는데 우주에 영성이 있다니요! 터무니 없는 주장이었죠. 제 평온함은 산산조각이 났고, 책을 덮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 책의 뭔가에 사로잡힌 나는 생태학 강의를 듣기 시작했고, 베리의 사상에 대해 격렬하고 열정적인 질문을 계속했습니다. 지도교수님은 (훗날 들은 바에 의하면) 제가 진지하고 비판적으로 텍스트에 몰입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내 어려움을 인내심을 가지고 참아 주었습니다. 나중에서야 내 인생 대부분에 영향을 미쳐 온 전체론적이고 지구 중심적인 세계관이 고전 철학, 스콜라주의, 조직신학의 경직되고 위계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세계관으로 대체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세계관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고, 신학 공부의 성공 여부는 후자의 관점을 받아들이는 데 달려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러나 나중에 토마스 베리의 강연을 듣고 그가 머무는 피정 센터에서 세션에 참석하는 것으로도 그의 사역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두 가지 사건으로 인해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수련원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동안 있었던 일입니다. 수련원 내 명상 장소 중 한 곳에 있는 분수대를 “수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분수대는 작은 폭포 밑에 있었는데, 폭포 위의 연못 물이 파이프를 통해 분수대의 급수대까지 흐르도록 만들어진 것이었어요. 하지만 작은 연못에 물을 공급하던 개울이 다른 경로로 흐르기로 결정하면서 분수대의 취수구에 도달하는 물이 부족해졌던 거예요. 제 임무는 물길을 바로 잡아 연못을 다시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작업을 끝내고 나니 분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원활하게 흘렀고, 모두가 제 성취를 축하해 주었습니다. 저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약 6주 후에 그 분수를 보러 갔습니다. 제 작업에 감탄할 준비가 된 상태였죠. 그런데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온통 덤불로 뒤덮인 광경이었습니다.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만 들릴 뿐 분수도 폭포도 보이지 않았어요. 나는 지구가 좀 웃기는구나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그간 명상을 하며 그 장소"에" 있었지, 그 장소"와 함께"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장소와 하나가 되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더 이상 분수를 볼 수 없는 곳에서 명상하면서 흐르는 물과 내가 합일됨을 느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