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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환경] 지구와사람 칼럼 8월호 - 너머로부터 펼쳐지는 생각들을 다시, 생각하는 책
  • 2022-11-14
  • 183
『지구의 꿈』,
휘어진 우주에서 삐딱하게 팽글팽글


내게 토마스 베리의 『지구의 꿈』은 생명의 느낌을 생명 너머로 틔워주는 통로였다. 우주의 진화를 이야기하는 훌륭한 책들이 너무도 많은데 하필 왜 이 책이었을까? 모르겠다. 다만, 이 책을 통해 광활하게 펼쳐지던 우주 이미지에 무수히 많은 꼬투리가 생겨나더니 그중 일부―그러나 여전히 무수히 많은―에 열매가 열리고 열렸다. 이 운동 이미지가 나를 휘감았고 나는 그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다. 그리고 나 아닌 누군가의 사유를 온전히 따라가며 그와 함께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또한 그 과정에서 인간과 지구를 진화해가는 하나의 ‘양식(樣式)’으로 보는 법을 배웠다. 그러고 보니 개체발생이 계통발생을 재현한다는 헤켈의 학설은, ‘닮은 것은 닮은 것을 낳는다’라는 인간의 주술적 사고서부터 자연계의 프랙탈 구조까지 확장되는 ‘패턴’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 감지(感知)가 헤켈 자신에서든 후대 사람들에게서든 고착된 기호가 되었을 때 그것의 편향됨이 도드라지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울어진 지구에 서식하는 존재가 어찌 편향되지 않을 수 있을까. 더군다나 이 어긋남, 불균형이야말로 생성에 관여하는 신비한 각도다. 지구가 기울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없었을 것이다. 지구가 언제나 약간 삐딱한 태도로 태양 주위를 공전하며 쉼 없이 자기를 굴리고 있기에, 어떤 생각이든 존재든 ‘습관’이라 할만한 것들이 계속 고이고 또 계속 스러진다. 이 복합적인 운동을 우리는 ‘마음’이라 부르기도 한다.

술 한 잔을 마시려고 해도 술병을 기울여야 하지 않나. 마지막에 살짝 둥글려주든가 흔들어주면 더 맛나다던가? 그러다 거듭거듭 좀 많이 마시게 되면, 정지해 있는 줄 알았던 지구의 반가사유(半跏思惟)가 실은 팽팽 돌고 있는 작태임을 깨닫게 된다. 우리에게 허용된 것은 술뿐이지만 어떤 동네 샤먼들은 아야우아스카나 매직머쉬룸으로 이 소용돌이를 재현한다고 들었다. 그 속에서, 태양과 그 너머 우리은하의 중심을, 또한 그 너머와 너머를 필사적으로 쫓아가는 동시에 벗어나려 하는 지구의 소용돌이를 경험하는 게 아닐까? 그리고 그 움직임에 속한 우리가 그 움직임을 각성하는 과정에 있음을 깨닫는 게 아닐까? 아마도 이 둘 함께 하는 것이 생명의 느낌이며, 토마스 베리가 말한 “진화하는 우주의 반성적 의식”이라는 양식이 아닐까? 

물론 반성적 사고는 인간만의 능력이 아니다. ‘잘못이나 부족함을 뉘우친다’라는 뜻이라면 모를까, ‘반성(反省)’이라는 낱말의 본래 뜻인 ‘돌이켜 살핌’은 생명과 함께 시작되었을 것이다. 언젠가 물질에서 떠올랐던 어떤 ‘형태’를 ‘누군가’가 선택적으로 기억하며 자기 시스템을 유지하게 된 것이 생명이라면, 그 누군가에게는 반성, 즉 이전에 있던 뭔가를 ‘해석하는’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반성적 사고를 ‘해석(解釋)’이라고 해석할 수 있게 된 것은 에두아르도 콘(Eduardo Kohn)의 『숲은 생각한다』라는 책을 만난 덕택이다. 이 책을 관통하는 퍼스 기호학에 따르면, 누군가에게 무언가의 어떤 부분을 표상하는 기호는 ‘해석체(解釋體)’를 생성하고 있다. 이를 기호작용(semiosis)이라 하며, 해석체란 기호작용을 통해 저 누군가에게 순간 맺히는 ‘새로운 기호’다. 즉 기호작용은 어떤 것을 그 자체로 전달하는 게 아니라, 기호를 거쳐 ‘부분적으로’ 그리고 ‘조금 다르게’ 퍼뜨리는 것이니, 이를 통해 새로운 기호들이 생겨나는 해석의 과정이고 또 다른 말로 반성이라 할 수 있겠다. 고로 반성이란 자기 자신이나 과거로 회귀하는 사고가 아니다. 그렇게 한 바퀴 굴리면서 다시 경로를 조금 바꾸어 미래로 나아가는, 혹은 미래를 불러오는 기호작용인 것이다. 그렇기에 적어도 생명은 우주의 어떤 곡률이나 법칙에 완전히 포획되지 않는다. 그 오묘한 휘어짐에서 태어나 그 곡률을 따라가는 가운데 그것을 재해석함으로써 우주를 살아있게 한다.


 『숲은 생각한다』,
수수께끼의 미궁을 다시 걷다

기호학을 창시한 퍼스(Charles Sanders Peirce)라는 사람은 우리가 생각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사고가 우리 안에서 생각한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생각의 산물이며 그렇기에 생각함으로 연대한다는 뜻이겠다. 퍼스가 어디까지를 ‘우리’로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퍼스의 생각을 활용하는 에두아르도 콘은 이 ‘우리’를 살아있는 존재들로 한정한다―물질의 영역은 책 후반부에서 기호작용의 토대라 할 수 있는 ‘형식’으로 논한다―. 살아있는 존재들이 생각함을 넘어 생각함 그 자체가 살아있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숲은 생각한다』는 이미 언제나 제기되어왔던 이 신비한 작용이 ‘어떠한’ 것인지를 인간 너머의 논리와 경험을 불러들이며 더 복합적으로 분석한 책이다. 이 책은 근래 부상한 ‘포스트 휴머니즘’과 같이 인간적인 것 너머의 영역을 탐사하면서도, 그러기 위해 생명의 기호작용에 초점을 맞추고, 또 이를 위해 먼저 인간의 사고와 언어 자체를 짚고 넘어진다는 점이 독특하다. 무심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많은 것들이 인간 너머의 것들에서 생겨났고 여전히 그것들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느끼기 위해서다. 그래서 이 책의 전반부는 인간의 사고가 살아있는 다른 존재들과 공유하는 더 큰 사고에서 어떻게 창발해 나왔는지, 그리하여 그 토대로부터 어떤 부분이 어떻게 구분되고 어떤 부분이 어떻게 단절되지 않고 이어지는가를 다룬다. 이 관문을 지나는 와중에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 책의 무대인 아마존의 아빌라 숲에 사는 여러 존재와 그들의 경험으로 들어가 점차 그들처럼 생각하게 된다.

이 글에서 이 내용을 다루지는 않겠다. 이 책은 수수께끼의 미궁이라서 직접 걸으며 풀려나오는 생각들을 ‘느낄’ 때에야 작동되기 때문이다. 다만 숲이 ‘어떻게’ 생각하는지―“How Forests Think”가 책의 원제다―를 말하기 위해 에두아르도 콘이 ‘어떻게’ 했는지를 조금 말하는 것은 좋을 것 같다. 그는 이 책의 가장 중요한 토대가 저자 자신과 숲의 존재들의 “경험들”이라고 하면서도 이와 함께 꽤 많은 이론을 경유한다. 퍼스 기호학, 디콘(Terrence Deacon)의 “창발” 개념, 베이트슨(Gregory Bateson)의 “이중 기술”이 도드라지지만,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꿈 분석,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의 “야생의 사고” 그리고 동료 인류학자인 데스콜라(Philippe Descola)와 비베이로스 데 카스트로(Eduardo Viveiros de Castro)의 이론 등도 책 전반에 퍼져 있다. 쓰고 보니 이론들의 향연, 그것도 남성 학자들의 향연 같다. 하지만 이 이론들은 에두아르도 콘이 드러내고자 하는 바를 ‘증폭’시키며 더 포괄적인 차원에서 초점을 모으는 “이중 기술(double description)”의 한 축이면서, 무엇보다도 기존의 사고방식으로 숲을 이해했다 여기지 않게끔 곳곳에 깔아놓은 장치들이라 생각된다. 이 이론들을 거친다는 것은 인간의 사고들을 반성하는 것이며, 이후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숲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루나족 사람들―특히 아빌라의 세 여자―과 숲의 각종 생물, 또 영적인 존재들의 사고에 젖어 들기 위한 탈피의 과정이다. 책의 뒤로 갈수록 저자는 이들 존재의 말이나 행위를 해석하지 않고―적어도 덜해석하거나, 인간적인 해석을 그치고―그대로 놓아둔다. 그 자체가 우리에게 작용하도록.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고안된 과정들이 만만치는 않아서, 처음에는 이 이론들 앞에서 주춤거리거나 걸려 넘어지게 될 터.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 생각이 거듭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다음 일화를 보자.

집으로 걸어올 때 오스왈도는
내가 조금 전에 발부리가 걸려 비틀거렸던
작은 그루터기를 가리키면서 예전에 내가
그 그루터기에 똑같이 걸려 비틀거렸던 걸
보았다고 말했다. (...) 취하거나 지쳐 있었던 탓에
숲길에 대한 나의 표상이 너무나도 어설펐음에도
나는 그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스왈도가 내게 그루터기를 콕 집어 말해주기
전까지 나는 그 그루터기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고,
내가 그 그루터기에―두 번씩이나!―걸려
비틀거렸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나의 비틀거림은 그 자체로 고착된 습관이 되어 있었다.

-에두아르도 콘, 『숲은 생각한다』, 차은정 역, 사월의책(2018), p.119-120.

이 책의 이론적 토대들을 나는 ‘보이는’ 그루터기들 혹은 그나마 ‘파악되는’ 선물들로 여긴다. 다 이해할 수 없어도 헛디디는 것이나마 가능한 영역이랄까? 또한 헛디딜 필요가 있는 ‘무엇’이기도 하다. 내 사고 습관을 뒤집고 둥글리고 때로는 깨뜨려주는 효과적인 장치들이기 때문이다. 저 그루터기들에 걸려 비틀거리다가 그것들에 걸터앉아 잠시 머무르던 와중에 나는 아빌라 숲에서 똑같이 그랬던 콘의 경험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자 그루터기가 지팡이로 변했다. 책 서두에서 제기되었던 스핑크스의 그 유명한 수수께끼, 너무도 “인간”적인 그 답을 다시 이해하기 위해 지참해야 했던 지팡이, 너 자신을 알라는 듯 구부러진 부분이 손잡이가 되는 지팡이 말이다. 『숲은 생각한다』를 읽는 것은 이처럼 함정 같은 그
루터기들이 마법의 지팡이들로 변신할 때까지 제자리를 맴도는 듯한 궤적, 즉 미궁을 그리는 일이었다.

지팡이들이 많아질수록 더딘 발걸음에 갈팡질팡하니 땅이 패이면서 ‘보이지 않던’ 그루터기들이 하나둘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쪽은 ‘잡히지 않는’ 알쏭달쏭들이 태반이었지만 저 이론들에서 말해지지 않은 부분들을 느낄 수 있도록 우리를 고양시켜 주는 묘약과 같았다. 그 묘약을 먹으면 이성적인 것과 감성적인 것, 과학적인 것과 신비로운 것, 인간적인 것과 그 너머의 것이 서로 구분되면서도 깊이 연결된 것임을 실제로 느끼게 될 거라고 말해본다. 과거 미노타우로스를 죽였던 영웅의 여정과는 다른 행보가 될 거라는 말이다. 이는 아티스트 꼬리표를 달고 은연중에 감성적 영역을 우월한 것으로 여기던 내 습관도 깨주었다. 이론적인 것을 통해 그것이 말하는 내용뿐 아니라 그것이 구성된 방식까지도 ‘느낄’ 수 있음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이 특별한 것은 분석이나 일반화 같은 방식이 실재의 생생함을 훼손하기는커녕 더욱 증폭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바로 그 분석과 일반화를 함으로써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는 우리의 인간적인 사고와 언어가 그 너머의 것들과 깊이 이어져 있는 것임을 실증한다.

그런데 이래서야 읽을 엄두가 안 나는 거 아닐까? 쓰다보니 너무 반성 모드로 갔는데, 때로는 반성 없이 뭣 모르고 청순하게 그 순간을 느끼는 것으로 충분한 법. 더욱이 이 책의 또 하나의 축이 바로 “느낌”이다. 저자가 독자들에게 뭔가를 당부한 경우가 두 번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다른 어떤 것과도 상관없이 그 자체로” 뭔가를 느끼는 것. 느낌이 바로 우리가 다른 살아있는 존재들과 공유하는 사고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여러 이론들을 그 느낌을 증폭시키는 장치로 활용하는 것이지만 그 모든 것을 파악하며 갈 필요는 없다. 그냥 읽어나가도 책 곳곳에 재미난 일화들이 즐비하다. 이를테면 숲에서 사슴들을 본 한 여성이 사냥을 하려고 총을 가진 남편에게 목소리로 신호를 보냈다 실패한 에피소드. 어째 남편은 듣지 못하고 암사슴만 듣는 바람에 순간 이종 간의 여성 연대가 이루어졌다. 수사슴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 너무나 진지하게 책을 읽던 나는 깔깔 웃으며 저 느낌의 연대에 속하게 되었다. 


좋은 이야기는 언제나 이미 수수께끼다


목소리는 하나이면서

수수께끼는 이렇게 시작된다. 그 다음이 우리가 친히 알고 있는 “아침에는 네 발, 점심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 그리고 다음은,

바다와 땅의 짐승들 중
유일하게 본성을 바꿀 수 있는 것,
그리고 가장 많은 발을 써서
움직일 때 가장 속도가 느린 것.

얼마 전 스핑크스의 수수께끼에 덜 알려진 처음과 끝이 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이것이 『숲은 생각한다』에서 끝까지 말해지지 않았다는 것에 감격했다. 이것들이야말로 이 수수께끼를 다시 탐사하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었으므로. 또한 부재(不在)가 존재의 바탕에 있음을 말하는 이 글이 그러함을 ‘글 자체로’ 이토록 말하고 있었으므로. 그런데 이렇게 이것을 발설해버리는 것은 내가 모순된-인간이기 때문이고, 좋은 이야기는 언제나 자기를 뒤집어 알리지만 그럼에도 감추어진 것들이 여전히 수두룩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친애하는 SF 작가, 르 귄(Ursula k. Le Guin) 여사께 들은 짧고 좋은 이야기를 소개한다. 『세상 끝에서 춤추다』(황금가지, 2021)에 실린 한 발표문에 따르면, 아빌라의 루나족처럼 안데스 산맥에서 케추아어를 쓰는 사람들 중에는 과거와 미래를 우리와는 반대로 위치 짓는 이들이 있다고 한다. 과거란 이미 아는 것이기에 볼 수 있는 ‘앞’에 놓여 있고, 볼 수 없는 미래는 ‘뒤’에, 어깨 너머에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뒷걸음질로 온다”. 뒤에서 뭐가 다가오나 잠깐씩 돌아보면서. 또한 어떤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는 “그는 앞을 보며 뒤로 간다”는 개념어가 있었다고 한다. 근처에 사는 호저라는 동물을 보면서 “미래를 안전하게 추측하기 위해 일부러 뒤로 움직인다. 그렇게 움직이면 적을 보거나 새로운 날을 볼 수 있다”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문득, 인간이 다른 생물들보다 뛰어난 게 있다면, 오랫동안 뒷걸음질 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과도하게 앞을 지향하느라 뒷감각이 퇴화해버린 대신 마음만 먹으면 몇 시간을 뒤로만 걸을 수도 있는 이상한 생물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것은 인간 특유의 사고 혹은 마음과 연관된 특성 같다. 갔던 곳에 다시 가고, 했던 생각을 다시 또 다시 하는 인간의 마음은 나무 그루터기에 새겨진 나이테 보다 훨씬 더 구불구불한 양태라는 것. 미궁은 이러한 반성적 사고의 궤적이 아닐까 한다. 하지만 뒤를 보며 앞으로 가는 보행법은 또 조금 다른 스탠스 같다. 아, 어떤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 복잡한 미궁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지만, 단순히 자세를 바꿔볼 수도 있는 것이구나! 지금 당장 180도 돌아서기만 하면 되니 참 쉽다. 그리고 뒤로 걸으면? 저절로 자신을 돌보고 주변에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 또한 시각뿐 아니라 청각, 후각, 촉각을 세워 온몸으로 민감 하게 감지하게 되는 효과도 있다. 목표는 흐려지고 주의가 분산된다. 산만한 분산이 아니라 지금 여기 단지 한 걸음에 혼신을 모으는 분산이다. 종종 어깨 너머를 흘긋 돌(아)보며.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며. 한 발. 한 발.


글 현 지 예
퍼포머, 드라마투르그. 기본적으론 탐색하는 사람이다. 움직임과 생각들 자체의 엉뚱괴발한 흐름을 존중한다. 그 흐름을 따라가며 들뜨(게하)는 일을 한다. 근래 〈몽움〉, 〈몸Q정전〉, 〈빗자루를 든 여자들: 며느리-마녀-여신〉 등의 스토리텔링 작업을 했고, [ground stat e]라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2022년 지구의 날 이튿날 지구와사람 회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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